(안부귀영화2) 프로덕션
촬영 일주일 전부터 매일 아침, 숙소 주변 숲길을 걸으면서 기도를 했다. 성당도 안 나가는 불신한 신자였는데, 역시 인간은 사악하다. 기도는 매번 똑같았다. "제발 사람 하나 안 다치고, 큰 일 없이 무사히 끝나게 해 주세요." 지금 생각해 보니 기도가 너무 착했나 싶다. "무사히 같은 거 관심 없고 무조건 재미있는 영화를 찍을 수 있게 해 주세요" 해야 됐나? 하지만 그런 기도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은 착실하게 내 기도만 들어주셨다. 어쩌겠어, 그런데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나는 저 기도가 우선일 것 같다. 그만큼 현장은 위험한 전쟁터이기 때문이다.
왜 현장이 전쟁터인가. 이전에도 말했지만 다 돈 때문이다. 영화는 돈이 만든다. 돈은 노동 시간과 노동력을 산다. 그러면 이제 노동하는 우리 불쌍한 일개미들은 정신을 빠짝 차려야 한다. 왜냐면 실수를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만약 개미1이 조명을 잘못 설치해서 그 조명에 누가 걸려 넘어지고, 조명이 현장으로 떨어지면서 촬영 시간이 길어진다면? 인명 피해는 당연 끔찍하고 그것을 복구할 노동력, 게다가 시간이 늘어나니 돈까지 더 든다. 그런데 그 외 온갖 팀들의 개미 2,3,4,5,6... 100까지 모두 제각각의 실수를 한다면? 그곳이 바로 지옥이다. 그런 일은 절대 있어선 안 된다. 아마 실수를 안 하게 될수록, 상업 현장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예외는 물론 존재한다). 어쨌든 나는 이미 이전 글, 06화 글(영화 촬영, 그 전쟁의 시작(2) https://brunch.co.kr/@chostar/29)에서 이 돈과 영화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현장에서 실수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렇게 말하면 웃기겠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이다. 영화배우, 감독, 촬영감독 정도...? 그리고 그 뒤에서는 피디가 눈에 불을 켜고 사람들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 살핀다. 사실 이 부분에 있어선 피디가 최고 권력자다. 예산을 관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누군가 실수를 너무 많이 한다 싶으면 가차 없이 잘릴 수도 있다. 그래서 현장 일 하는 사람들이 더 자부심을 느끼는지 모르겠다. 왜냐면 실수를 안 하기 위해 현장 스태프들은 정말 오감을 곤두세우고, 미리 준비한 것들을 다 계획한 대로 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긴장을 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예전 필름 시대 때 그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고 한다. 왜냐면 말 그대로 진짜 필름을 썼는데 필름은 다 돈이다. 그 말은 한 번의 테이크가 너무나 소중해진다는 것이다. 필름 시대 경험은 없어 나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상상이 간다. 카메라 롤! 하고 필름이 돌기 시작하면 모두가 숨죽이고, 이제 무대에서 연극이 펼쳐진다. 그 후 컷! 소리가 들리고 필름이 멈추면 숨 죽이던 스태프들이 또 하나의 완벽한 다음 테이크를 위해 빠르게 슈슉 움직이며 각자가 맡은 일을 또 휘리릭 준비해서 무대를 다시 만든다. 그러니 옛날 영화 스태프들은 얼마나 살 떨렸을까. 지금도 그 긴장감이 어마어마한데 필름 시대를 생각해 보면 일하는 사람으로서는 끔찍할 정도다(그러나 그만큼 더 큰 쾌감도 있겠지?).
내 추측일 뿐이지만 이 숨 막히는 긴장감 때문에, 현장 스태프들 중 가끔 영화는 자기들이 만든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그것은 사실이 아님에도). 왜냐면 프로덕션은 정말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실수해선 안 되는 무대니까. 프리든 포스트든 어떤 단계에서든 실수를 하면 안 되지만, 상대적으로 프리와 포스트 때는 개개인이 조금 실수를 해도 고쳐나가면 된다. 고쳐 나갈 시간이 있다. 그러나 프로덕션은 다르다. 그 순간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다 같이 몰려들어 찍고 끝나버리기 때문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그래서 영화인들은 메뚜기떼에 비유가 되기도 한다. 메뚜기떼가 현장, 로케이션을 휩쓸고 후루룩 뚝딱 하고 지나간다는 것이다(여기에는 쑥대밭을 만들어놓는다는 안 좋은 의미도 있다). 여하튼 그런 상황이라 프로덕션이 모든 스태프들의 긴장이 가장 농축되어 있어 인텐스한 시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말하면 아마 포스트 스태프들이 화를 내겠지? 특히 CG, 편집 쪽이 열받으려나? 물론 이들도 데드라인에 쫓기며 작업을 해야 하고, 이들만의 전쟁터에서 싸움을 한다. 그래. 그러면 이렇게 말하겠다. 프로덕션은... 연출이 가장 최악으로, 본능 그대로,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싸가지 없는 면모를 보이는 때다.
이번에도 내 고백이다. 내가 가장 성질 더러웠던 때가 프로덕션 때다. 왜냐면, 실수는 나만 하고 싶으니까! 나 혼자도 실수해야 할 것이 산더미인데! 이것 때문에, 저것 때문에, 테이크를 다시 가야 한다고? 나는 연기에 만족했는데, (예시) 보조출연이 잘못 움직여서, 미술팀이 소품을 잘못 놔서, 촬영이 실수해서, 조명이 흔들려서, 수만 가지 문제들 때문에 또다시 가느라고 촬영 시간이 허비된다고? 촬영 시간이 허비되면 이후 촬영 예정 씬들 찍을 시간이 줄어들게 되고, 그 말은 내가 실수할 시간이 또 줄어든다는 얘긴데? 그 생각을 하면 부글부글하던 화가 용암이 파바방 터지듯 폭발할 것 같았다. 나는 신인이니까 미숙함이 있어 실수해도 되고, 나 외의 다른 스태프들은 (그들도 나와 비슷하게 미숙한 부분들이 있을 텐데) 실수하면 안 된다는 이 성격파탄자를 어쩔...?
이 말을 길게 하는 이유가 있다. 왜냐면 이게 연출의 가장 중요한 능력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연출은 영화를 위한 화면 연출, 배우 연출을 한다고 끝이 아니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게 사람 연출이다. 모든 스태프 연출. 헤드급부터 막내까지 긴장을 잔뜩 한 채 필사적으로 움직이며 일하게 만들어야 한다. 모두 하나하나가 자신의 한계를 밀어붙이며, 없던 능력까지 스스로 발견해 내면서 이 작품을 위해 목매달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을 해내는 것이 연출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그런데 이 연출의 능력이자 기술은 어디를 가도 배울 수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사람 연출 101 클래스 같은 게 있다면 참 좋겠다만...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잘하는 방법을 알려줄 수가 없다. 또 사람이 움직이는 일이기 때문에 정치질, 패 나누기, 심지어 왕따(?) 같은 일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아니... 벌어지기도 하는 게 아니라 하늘에 대고 맹세하는데 모든 현장에 매번 벌어지는 일들이다. 이 영화 외의 것들(인간관계들, 인간들과의 싸움들)을 하느라 진이 다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연출 동기들끼리 오죽했으면 서로 이런 말을 했었다. "제발 그냥 영화에만 집중할 수 있는 현장이면 여한이 없겠다"라고.
그렇게 사람 연출이 어려운데, 아직 우리 모두 어설픈 게 많아 현장 여기저기에서 실수들도 팡팡 터지고 있다? 그것은 완전 폭죽놀이다. 지옥의 폭죽놀이. 그 폭죽에는 연출의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발겨진 채 태워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영화의 퀄리티가 점점 떨어지는 것이다. 가끔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아니 내가 발로 찍어도 이것보단 잘 찍겠다' 싶은 영화도 있다. 많다. 알고 있다. 미안하다. 그런 영화들은 그 샷들을 찍는 현장에서 필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을 거다. 영화를 위한 전쟁뿐 아니라 인간관계에서의 전쟁까지도. 그러니 연민을 가지고 봐 주... 기엔 영화 표 값이 너무 비싸다. 젠장. 연민은 무슨 연민이야. 무슨 전쟁이 벌어지고 있든 영화나 잘 만들란 말이야!
"이런 숨 막히는 여러 전쟁이 동시 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데 도대체 신인이 연출을 어떻게 해요?" 하고 궁금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흠. 좋은 질문이다. 그러나 정답을 모르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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