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21
정후가 자다 깨서 더듬어 나를 찾는다.
"엄마. 너무 무서운 꿈을 꿨어."
요즘 도통 긴밤 못자는 준후를 보듬고 누운 내가 손끝을 힘겹게 내밀어 정후에 닿는다. 뒹굴뒹굴 다시 내 손바닥 위에 머리를 대고 잠을 청하는 정후.
까마득한 새벽녘의 일이었다.
굉장히 인상적인 꿈이었던지, 녀석이 일어나자마자 꿈 얘길 다시 한다.
"엄마. 준후는 어젯밤에 무슨 꿈 꿨을까? 나는 너무 너무 무서운 꿈을 꿨어. 으~"
사자가 엄마 껍질을 벗기는 꿈. 너무 무서웠지만 용감하게 달려들어 칼로 사자의 목젖을 찔러 물리쳤다는 이야기.
아침을 대충 때우고 공동육아에 나서는 길, 후가 불평을 늘어놓는다. 먼저는 터닝메카드 양말이 없다고 울먹였다. 두어번 달래는 척 하다가 다소 정색을 하고 정후를 채근한다. 아차피 터닝메카드 잘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했잖아. 그리고 좋은 것도 아니야. 정후가 이러면 다음엔 못사지. 터닝메카드 양말 신을 때 감사하고 못 신을 땐 다음에 신을 걸 기대해야 사주지, 없다고 불평하고 떼쓰면 담엔 절대로 살수 없어.(대학가면 술 마시고 클럽가고 싶어 설레하는 범생이마냥.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터닝메카드에 대한 동경에 가득찬 4세. 형아들의 세계를 넘보며 꽤 아는 것처럼 허세부리고 싶은 4세 너란 아이 훗) 겨우 진정하고 나서는데..뜬금없이 어젯밤에 하던 이야기를 다시 꺼내 이어가는 정후.
"엄마랑 H이모는 너무 나를 많이 시켜. 심부름좀 그만 시켜요. 나도 이제 힘들어. 나한테만 너무 다 시키고. 엄마랑 이모는 빈둥빈둥 누워서 놀기나 하고."
앞단락엔 귀여웠는데, 그게 뭐라고 4세 입에서 튀어나온 빈둥빈둥 이란 단어가 내 심기를 몹시 건드렸다. 책을 좋아하는 정후는 이런 저런 표현을 익혀두었다가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꺼내 쓰곤 하는데.... 오늘만큼은 내 과민한 지점과 컨디션 저조, 정후의 불평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져 폭발하고 말았다.
뭐시라? 빈둥빈둥?
내가 얼마나 힘에 부치게 용을 쓰고 있건만.
돌려받지도 못할 수고를 사랑 하나로 버티고 해내고 있건만. 쬐끄만게, 빈둥빈둥이라고?
하극상을 잘 참지 못하는 내가 얼음장처럼 무표정해지고 말았다. 표정도 없이 "그럼 앞으로 정후가 요리도 하고 빨래도 하고, 설거지, 이불개기, 준후돌보기, 정후 목욕시키고 재우기, 쓰레기버리기 등등. 다 해. 엄마는 안할게."
"왜에? 내가 왜 해?"
맥락을 미처 파악못 한 정후가 해맑게
"나 아빠돼야하니까 연습하라고?"하다가 내 표정을 발견하고는 시무룩해져 입을 씰룩댄다.
"알았어. 대신 요리는 해줘. 내가 다른 건 할게."
(뭣이라고오?! 엄마=요리해주는 사람이냐!)
쬐끄만 녀석의 담담한 반격에 더 빡친(그야말로;) 내가 냉정하게 문을 나서며 정후에게 가방을 들렸다.(아무것도 안들어있긴 했지만) 그마저도 무겁다며 들어달라는 정후에게 스스로 해야한다고. 네 눈에 엄마가 빈둥빈둥 아무것도 안하는 것 같아보이느냐고. "화 좀 내지마 쫌." 이어지는 정후의 궁시럼에 정신이 번쩍 들었으나 이미 너무 멀리와버린 나. 유치한 내 수준에 민망하면서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기분에 우울해져버렸다.
찜찜한 마음을 뒤로 하고 정후를 데리러 가는 길. 평소와 달리 정후가 반갑게 달려나오지 않는다. 그럴 수도 있는데 쭈그리가 된 내 마음탓에. 유독 그렇게 느껴진다. 돌아오면서 정후에게 물었다. 오늘 하루 괜찮았냐고. 정후가 힘들어서 한 말이니 엄마가 잘 알아주고 그런 표현은 안된다고 넉넉히 가르쳐줬어야 했는데.. 요즘 사실 엄마도 힘들어 짜증을 냈다고. 미안하다고. 나를 포용해주는 정후. 정후 입에서 나온 말이 뜻밖이다.
"나는 다른 건 괜찮았고 생각 안났는데 사실.... 엄마가 공격당한 꿈이 자꾸 생각나서 슬펐어."
아. 그랬구나.
생각지도 못한 답이었다.
많은 시간 함께하기에, 아이를 잘 알고 있단 생각에, 왜인지 아이의 하루가 내 하루와 비슷할 것만 같지만. 그렇지 않다. 훌쩍 커버린 아이에겐 제 나름의 세계가 있고 하루가 있고 독특한 자기만의 반응이 있다. 엄마이기에 거즘 다 알 것맘 같지만. 사실 아이는 나와 또 다른 인격, 온전한 하나 그 자체.이제 내 예상과 범주를 넘나드는 아이를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초청해야만 하는 때다.
얼마 전에도 청소 때문에 비슷한 일이 있었다.
장난감과 책을 온 방 가득 어지른 정후에게 같이 치우자 하니. "엄마가 하라"고. 이유는 나는 귀찮으니까. 그 대사에 발끈한 내가 ㅋㅋㅋㅋㅋ 지각하면서까지 정후에게 끝까지 청소를 시켰다. 한번은 공동육아 방에서 아이들과 함께 청소를 하려는데 정후가 거부한다. 엄마가 하라고. 왜냐니. 엄마는 늘 청소하고 있으니까.
계단식 성장을 이뤄가는 아이 덕에. 가끔은 어제의 걔가 오늘의 얘가 맞나 싶을 정도로 이질감에 휩싸이는 순간들이 있다. 심부름도 청소도 같이 잘하던 정후의 반항. 그러다가도 세탁기 사용법이며 욕실청소까지 도맡아 하려는 열정. 그 모순 사이에서 엄마인 나조차 휘청휘청 춤을추며 흔들거릴 때.
다시 멈춰 서 심호흡한다.
그래. 사랑은 내게 속한 것이 아니다.
발버둥 쳐도 곧 고갈돼 버리는 나란 자원에 기대지 말고. 더 넉넉한 가슴에. 더 풍성한 사랑에 기대는 통로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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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괌으로 여행을 갔다. 사진을 본 정후가 부러워한다. 자기도 아빠랑 엄마랑 제주도에 다시 가고 싶다며. 그 말을 들은 J가. "정후야. 제주도 갈 돈이면 괌이나 비슷해." 내가 "괌이 얼마인줄 알고 하는 말이야?"하고 되받아쳤다.
블럭을 하던 정후가 담담히 대답한다.
"엄마. 감은 하나에 이천원이야."
ㅎㅎㅎㅎㅎㅎ
그래. 넌 네 살이었다. 훌쩍 자라 큰 형아가 돼버린 것 같아도...넌 아직 네 살에 서 있는 거구나.
영하란 말이 나올 때마다 영화가 보고싶다는 정후. 오늘 영하라 친구를 못 만난다면 친구가 영화를 보러갔느냐며 반문하는 정후. 아이의 마음에 아재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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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후는 내 기분이 안 좋아보이면 블럭을 만들어 와 선물하곤한다. 내 기분 아랑곳 않는 아이에게 더 화가 나려 할 때마다, 블럭을 건네며 한다는 말이. 엄마 기분 좋게 해주려고 만들어 왔다고. 만드느라 오래 걸렸다고.
내 잰걸음에 아이의 속도를 억지로 꿰맞추려 말고. 아이의 관점에 내 틀을 껴맞추려 말고.
아이의 실수에 내 약점을 정당화하지 않고.
인격 대 인격으로 함께 성장해가는 하루.
내일은 더 넉넉하게 사랑할 수 있게 하소서.
천국에 기억될만한 사랑으로 내 아이와 세상을 품는 하루가 되기를 바라며, 굿나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