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 속을 닮은 가방
국회 행사를 마치고 나오던 길이었다. 맡겨둔 신분증을 받아 지갑에 넣으려고 가방에 손을 넣는데, 아이들 양말이 튀어나왔다. 그것도 두 켤레 씩이나. 가지런히 정리된 새 양말 한 켤레와, 아마도 아이가 신다 벗어 내게 맡겼을 헌 양말 한 짝. 신다 만 양말은 가방 구석 구석에 제각각 흩어져 있었다. 그걸 모아 하나로 접으면서 생각했다. '가방마저도 주인 머릿속을 꼭 닮았구먼.'
그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데 어느새 윤증로에 다다랐다. 버스를 타러 뛰어가는데, 거리 한 귀퉁이에서 아이들과의 추억이 불쑥 튀어나왔다. 올 봄 벚꽃 축제 마지막 날, 아이들과 윤증로에 갔었다. 길거리에서 나조차도 생전 처음보는 풍선을 팔고 있었다. 놀이공원 풍선처럼 커다란데 전구를 달아놓아 불빛이 나왔다. 심지어 그 풍선 안에 깃털이나 캐릭터 모양의 작은 풍선이 들어 있기도 했다. 두 아이가 싸울까봐 똑같은 풍선 두개를 샀었다.
그렇다. 가방 속에도, 거리에도, 그 어디에도 아이들 흔적이 가득하다. 내 삶 도처에 아이들이 있다. 어느 날부턴가 나는 아이들 없이는 나 자신을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구태여 설명하자면, 사실은 아이들 없이 나를 설명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오늘의 나는, 분명 엄마가 되기 이전과는 다른 존재다. 나의 저항은, 엄마와 나 둘 중 하나를 소거하라고 강요하는 세상에 대한 저항일 뿐, 나로부터 엄마란 정체성을 거세하기 위한 몸짓은 아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물론 나는 모든 여성들에게 엄마이길 강요하고, 모든 엄마에게 엄마이기만을 요구하는 사회에 강력히 반대한다. 이 땅의 모든 엄마들에게는 엄마이기 이전에 자기 자신일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런 점에서 '엄마란 정체성 없이 나 자신을 설명할 수 없는 나'의 상태는 어쩌면 급진적 여성주의 일각에서 비판 받을 여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누구도 이런 나를 비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를 사랑하고, 나만큼이나 아이들을 사랑한다. 그게 전부다. 물론 나는 대체로 많은 순간 아이들보다 나 자신을 더 사랑하는 나를 발견한다. 심지어는, 나를 많이 닮은 아이에게 한 없는 애정과 애틋함을 느끼는 나를 보며 사랑이 아니라 나르시즘이 아닐까 싶었던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종종, 나 자신보다도 아이들을 더 많이 사랑하고 걱정하는 나도 발견한다. 그런 모습 역시 나의 일부다. 혹여 우리 모자(들)에게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치면, 아이들의 안전과 생명을 위해 나의 목숨 따위 기꺼이 버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평상시에는 "엄마도 사람이야!!"를 외치며 우리 동네 제일의 호랑이로 변하기 십상이지만, 아이들이 아프다거나 등등의 위기에 닥치면, 나 스스로조차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왔다. 아이들이 막 태어났을 때보다도 엄마 6년차에 접어드는 지금 엄마 조성실은 더 단단해졌다. 우리의 우정이 더해 온 세월의 무게만큼.
가방 속에서 발견 된 아이들의 양말, 아이들과 풍선을 샀던 거리 등등.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육아일기를 악착같이 써 공유하는 이유는, 이 글의 연재가 정치적인 행위의 연속이라고 믿기 때문에서다.
나는..... 전업모로서 살아온 나의 시간과 일들을 (스스로) 증언하고자 글을 써왔다.
사회가 인정해주지 않는 나의 세월과 경력을 스스로 증언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었다. "너희들 때문에 꿈도 세월도 다 바쳐왔"노라고 말하는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서. 아이들의 떠나는 걸음을 힘차게 응원하는 엄마이고 싶어서. 아이들이 들어찼던 자리가 텅 비게 될 순간,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 나의 지난 시간을 증명해주지 않을 순간을 대비해 글을 쌓아 두고 있었다. 훗날 초라한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엄마란 이름 뒤에 지워진 내 본연의 이름을 찾아 헤매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엄마 '조성실'로 고군분투했던 흔적들을 남기고 싶었다. 첫 임신부터 틈틈히 써 온 육아일기는, 엄마로서의 정체성과 조성실이란 개인의 정체성이 분절될 수 없단 사실에 대한 일상의 증언이었고 매일의 고백이었다.
임신 당시 나는, (다섯 남매 태어나서 한글 배울 때까지) '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를 읽고 깊은 감회를 받았다. 그 외에도 할머니가 내신 여러 권의 책들을 모조리 탐독했다. 그리고 책 속에 적혀있는 정보를 토대로 할머니 전화번호를 알아내 전화까지 걸었다. 어떻게해서든 할머니를 찾아뵙고 싶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찾아뵙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내 요청에 할머니는 단박에 '그러라'셨다. 그렇게 인천에 있는 할머니 댁을 찾아갔다. 할머니는 글을 통해 엿보았던 모습 그대로셨다. 무척 연로하신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림 강의를 하고 계셨고, 계속 글과 그림을 이어간다 하셨다. 사위 분에 대해 적어 둔 글만 모아도 책 한권은 거뜬히 나올거라셨던 기억이 난다. 신데렐라와 백설공주 같은 전형적인 동화가 싫어서, 성가대 악보를 이면지 삼아 직접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지어 아이들에게 동화로 읽히셨다던 할머니. 그 당시 그려두셨던 동화가 책으로 나올 예정이라고도 하셨다. 헤어지기 직전, 할머니께서는 만삭인 나와 뱃속의 아이를 위해 기도해주셨다. 2013년 6월 20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구십이 넘으니 완행 열차처럼 슬슬 몸이 쇠하는게 느껴져.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이 점점 더 내게 삶의 전성기를 주신다. 불평과 원망으로 그리고 우울해지려면 한없이 그럴 수도 있었지만 내가 원래 그리 생겨 먹었어. 그저 매일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충성했지.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게 그것뿐이잖아. 신기하게도 그러다보니 정말 감사하고 기뻐하게 되더라. 감사와 충성, 그것밖에는 없지 뭐."
할머니의 육아일기는 내게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단편적 사건이 아니었다. 현격한 시대적 한계 속에서도 능동적이고 자주적으로 살고자 몸부림 친 한 사람의 치열한 기록은, 그 자체로 역사적 사료가 되었다. 역사가 자신을 기록해 주지 않아도, 제 스스로 자신의 삶을 증언할 줄 아는 삶의 당당함과 위대함을 보여주는 전범이었다.
그리고 나는 '사적이고 개인적인' 내 삶의 기록과 증언이 그 자체로 지극히 '정치적인' 행위일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악착같이 써내려가는 육아 일기 곳곳에서, 엄마가 된 82년생 김지영들의 집단적 경력단절 현상이 왜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의제일 수 밖에 없는지 틈틈히 증언될 것이고, 내 본연의 이름과 엄마로서의 정체성 둘 다를 보듬기 위해 애쓰는 매일의 고백에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바꾸고자' 하는가가 드러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국회의사당 의원회관에서 '촛불 항쟁과 사회운동의 전망'이라는 학술 심포지엄이 있었다. 촛불 첫만 시민에게 세계적인 인권상을 수상해 뉴스가 되었던 독일의 에버트 재단이 후원하고,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 기록기념위원회가 주최,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가 주관하는 자리였다. 나는 세션 7(인권의 정치와 광장의 민주주의)에 라운트 테이블 토론자로 참석해 '엄마, 정치, 그리고 2016 촛불 혁명(정권교체를 넘어 일상을 바꾸는 촛불혁명, 기대할 수 있을까?)'란 제목으로 글을 쓰고 발표했다. 때마침 오늘은 유례없이 미세먼지가 없이 쾌청한 날이었다. 본래의 계획대로라면 아이들은 아침 일찍 아빠와 나가 하루를 보내고, 나는 어젯밤 미처 보내지 못한 미완의 토론문(다른 학회 준비용)을 마무리하고 학회에 가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미세먼지가 3이라니! 이런 날은 도저히 놓칠 수 없어! 내 마음이 외친다. 이미 아이들도 아빠도 한껏 들떠있다.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붙잡았다. 결국 급하게 아이들과 파주로 떠났다. 파주 하니랜드에 도착해 1시간 안에, 놀이기구 7개를 섭렵하고 국수와 떡볶이, 오뎅을 시켜먹고 국회로 향했다. 이동 중에 갑자기 큰 볼 일을 보고 싶다는 아들 덕분에 화장실을 찾아 헤매고, 강변북로에서 하필 사고가 일어나 우리 앞에서 차가 엄청 정체됐다. 아슬아슬하게 토론장에 도착했다. 발표 마치고 보니 내 어깨에 아이들이 묻힌 딸기 국물이 가득했다. 그렇게 정신 없이 토론장을 나서던 중 가방을 더듬다 아이들의 양말을 발견한 것. '참말로. 그것 참 (아이들 뿐 아니라) 가방마저도 주인 머릿속을 꼭 닮았구먼.' 하며 혼자 너털 웃음을 짓고 말았다.
집에 돌아와 아이들과 함께 택배를 열어본다. 두 권의 책. "정치하는 엄마가 이긴다" 정치하는 엄마의 첫 책이 도착했다. 필자로 참여한 10명의 사람들에게 2권씩 우선 배송된 책. (공식 온오프 서점 판매는 21일부터 시작) 두 권에 각각 아이들 이름을 적어 넣는다. "엄마. 내 책은 어느 쪽이야?" 큰 아이가 물었다. 그리고는 이어 하는 말이 "그럼 나는 준후 것 먼저 펴봐야지. 내 껀 아껴 두려고. 어른 될 때까지 가져야 하니까."
샤워를 하고 나오려니 거실에서 큰 아이와 아빠가 쿵짝 쿵짝 작전을 짜고 있다. 나더러 몸에 물기 닦으러 나오지도 말라한다. 그리고는 바람을 잡는다. 시간이 필요하다나. 조금 기다렸다 거실로 나갔더니, 바닥엔 두 장의 스케치북이 널부러져 있고, 아이는 용수철처럼 콩콩콩 뛰어다니며 울기 시작했다. 방으로 들어가버리는 아이들 아빠. 도대체 이건 무슨 상황이지. 보자하니, 아이가 아빠에게 대필을 부탁했고, 의뢰인은 아빠의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마도 그려 준 하트의 크기나 모양이 제 성에 차지 않았나 보다. 그리하여 발생한 의뢰인과 대필 작가간의 다툼. 결국 내가 진화했다. 그렇게 아이에게 받은 편지. "엄마 사랑해요. -정후가" 큰 아이를 재우고, 거실로 나와 책을 펴 보았다. 아이에게 받은 편지와 책을 한 앵글에 넣어 사진을 찍었다. 궁금한 건 못 참는 둘째가 끼어든다. 미처 잠들지 않은 둘째의 발까지 함께 사진에 찍혔다. 며칠 전 아이들에게 받은 어버이날 편지까지 더해 코팅을 해 둘 요량이다. 근사해보이게.
비롯 나의 머릿 속은 내 가방 속 만큼이나 어수선하지만, 그럼에도 오늘 같은 날이면 치열한 우리의 일상, 그 매일을 충실히 살아가는 나 자신을 보며 감탄도 해댄다. 한껏 허세도 부리면서, 나 자신에게 스스로 찬사도 보낸다, 가끔씩은.
'어쭈. 제법인데. 녀석 참 멋진데. 넌 세상을 바꾸는 멋진 사람이야!' 쓰담쓰담 하면서.
그러면서 하는 생각. '그래도 언제 한 번 가방 정리는 해야겠다.' 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아마 내일도 그럴 것이다. 당분간 내 가방은 내 머릿 속만큼이나 복잡하고 어수선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사람이 완벽하면 못 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