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10 남편이 쓰러졌다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유산 위험으로 일을 그만두면서 나는 대략 2년이 못 돼 다시 일터로 복귀하리라 예상했다. 출산 후 100일도 되기 전에, 개인적인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잠 못 이루며 국회 보좌관 양성 교육을 찾아 들은 적도 있었다. 허겁지겁 퇴근한 남편과 교대해 부리나케 강의실로 달려 가거나, 강의실 앞에서 아기띠 채 아이를 교대하며 강의를 듣기도 했다. 어떤 날엔 아이를 맡기지 못 해 아이를 안고 강의실에 갔다. 몸은 고됐지만, 그럼에도 '무엇이든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안도시켰다. 그래. 도태한 것은 아니다. 나는 잠시 사회를 떠나 있지만, 여전히 달리고 있다. 뭐, 그런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이것 저것 기회 닿는 대로 일을 했다. 간간히 조사 보고서를 외주 받아 쓰기도 했고, 능률협회에서 진행하는 컨설팅 관련 프로젝트를 재택으로 가능한 범위에서 맡아 하기도 했다. 돈이 필요해서이기도 했고, 경력이 단절 되는 것도 두려웠기에, 일과 육아 둘 다를 커버할 수준의 초인적인 힘이 나왔다. 돌아보면 참으로 악착같이 살았다. 보고서 납기를 마치려고 이틀 밤을 연이어 새기도 했고, 밤중 수유중인 아이를 두세시간 간격으로 젖 먹이며 밤새 보고서를 쓰는 건 예사였다. 그랬지만 나는, 결국 일터로 복귀하지 못했다. 예상치 못하게 둘째를 임신했고, 상상조차 한 적 없던 유산도 연이어 경험했다. 두번째 임신의 조기 종결은 나와 가족의 삶을 통째로 흔들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고, 심지어 제대로 된 심장 소리조차 들어보지 못한 태아의 상실은, 생각보다 괴로운 일이었다. 그 여운이 오래갔다. 그 여운 속에서 생애 처음으로 계획이란 걸 내려 놓았다. 어떤 것도 계획하지 않고, 하루 하루를 살아보자. 평생을 스스로에게 주마가편 해오던 나 자신과 잠시라도 결별하자. 카르페디엠. 어차피 허락된 시간이라면, 괴로워하지 말고 만끽해보자. 그런 심산이었다. 그렇게 지내는 와중에 둘째가 우리에게 왔다.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 본 남편. 그럴 필요 없다는 나의 만류에도 그는 언제나 가장으로서의 무게를 짊어져왔다. 지난 육년간, 그 역시 꾸준히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오늘까지 왔다. 허울 뿐인 아빠로 남지 않기 위한 그의 몸부림은 오늘도 여전히 계속 된다. 이 과정을 지나며 일종의 전우애 같은게 싹터 왔다. 서로를 탓하다가도, 아이가 버릇 없이 둘 중 한 사람이라도 대할라치면. 갑자기 원팀이 되어 연정이 시작된달까.
둘째가 태어나기 직전 남편이 쓰러졌었다. 이년여가 지나 우연히 그 당시 일기를 다시 읽었다. 카스가 지난 기억을 일깨워주었다.
불현듯 상대가 안쓰럽게 느껴진다.
그대 참 애쓰셨소.
한 마디 건네며 어깨를 토닥인다.
그렇게 오늘도 주절주절 '지극히 사적인' 육아일기.
(이 당시와 현재의 내 인식이 조금 달라진 바가 있지만,
구태여 수정은 하지 않았다. 그 당시 sns에 게재한 원문 그대로를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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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가 과로로 쓰러졌다.
그 날도 어김없이 웃는 얼굴로 들어와 먹고 싶은게 없느냐 물었다. 그 날 따라 외식을 하고 싶어 비가 오는데도 차를 끌고 나가 식사를 했다. 집에 돌아와 과일을 먹는데. 애써 재밌게 태연히 그렇게 심각한 얘기를 아무 일 아닌 듯 털어 놓는.
"오늘 아빠가 엄청 열심히 일했어요. 엄청 열심히 날도 더운데. 집에 일찍 오려고. 그리고는 엘레베이터를 기다리는데↑너무 숨이 차서 잠깐 앉았어. 근데 갑자기 정후랑 엄마 얼굴이 보이는거야. 순간 진짜 행복해서 한참 실실 웃었거든. 그리고는 눈을 떴는데 갑자기 천장이 보이더라고. 그 때 사람들 소리가 들렸어. "환자 분 환자 분 정신이 드세요? 혹시 간질 있어요? 응급실에 전화해뒀어요~" 얼마나 창피하고 당황스럽던지. 특히 정후랑 엄마 생각하며 한참 헤벌쭉 웃었던게 너무 민망해서 도망치듯 피해나와버렸지 뭐야~"
뭐라고?
그리고 다시 얼굴을 보니 광대가 새파랗게 멍들어서 부어있다. 내가 알아보니 그제서야 이빨도 너무 아프고 어깨 허리 골반까지 다 멍들었다고..
생각이 많아졌다 J를 먼저 재우고. 그 다음 날도 바쁘단 사람을 닥달했다. 퇴근길에 잠시 들려 진맥이라도 받으라고 한의원에 보냈다. 곧장 양방병원에서 혈액검사 간수치 초음파 등을 받아보고 결과지를 가지고 다시 오라며 단단히 겁을 주셨다 한다. 그 날 밤 일찍 잠든 두 남자와 달리 나는 한참을 뒤척였다.
만감이 교차한다.
당장 어떤 일이 일어나서라기보다는
중병에 걸렸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보다도.
뭐랄까..
그냥 부던히 애써온 그의 두 어깨가 한없이 안쓰럽고 미안하고.
동시에 어떤 수를 써도 늘 피곤해만 보이는 그가 시원찮고 못마땅하고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더 잘 할 순 없는데.. 웬만한 커버는 그래도 나름 다 해내고 있는데, 후랑 놀아주는 것도 거즘 다 내 몫인데, 주말 상관없이 늘 출근하는 J 대신 다른 엄빠 사이에 껴 아이를 업고 안고 돌아다녔던 지난 주말들이 떠오르며.. 대체 어디까지 내가 더 잘해야 하는건지 싶은 생각에.. 마음이 무겁고 또 한켠으론 불만족스러운. 그런. 많이들 착한 남편 덕에 살림 부담도 적을거라 예상하지만,(그런 면도 없지 않지만;) 남편에게 아이 맡기고 회의며 약속이며 잘도 나가고 불러대는 파티걸이라 놀기리도 하지만...사실상. 따져보면 횟수도 많지 않고, 뭣보다 남들은 모르는 내 몫의 짐을 나 역시 부던히 지고있단 생각에 괜시리 억울함까지 교차하면서. (진짜 억울했나봐 ㅋㅋㅋ 엄청 길고 장황하게 썼다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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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가장 큰 건
생각보다 인생이 짧을 수도 있다는 경각심
함께 할 날이 영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부담감이었다.
받는걸 당연히 여기면서
내가 더 어리고 그가 더 먼저 좋아했단 이유로 늘,
그가 나보다 좀 더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게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나였기에...
왜인지 모르게 깊은 멘붕이 찾아왔다.
쭈그려 앉아있었는데도 그 정도 타박상이면. 혹여나 서있다 그랬으면, 계단이라도 걷고 있었으면, 차도에서 뛰다 그랬으면 어쨌나 싶어 아찔했다.
그런데도 그는 태연하다. 별 일 아니야. 난 건강해. 내가 너보다 오래 살거야. 쓸데 없는 걱정마. 재밌지도 않은 농담을 계속 해댄다. 왜인지 처연하게.
초반 몇년 우리 관계는 'J의 사랑과 섬김이 필수적으로 전제된, 그야말로 결과값'에 가까웠다. 그러다 어느 순간, 혹여 J가 잘못되더라도 '그간 받은 사랑을 추억하며 살 수 있겠구나' 싶었다. 요즘은. 후에게 "싸우지 마~ 사이좋게 지내"란 타박 아닌 타박을 듣기도 하며 종종 싸우고 그러다 칼로 물베고 살고 있다. 아이를 낳은 후로 수 없이 날 설 일도 많았고 잦았던게 사실이다. 너무 다른 가치관, 언제나 당연한 만성피로, 끝나지 않는 일 살림 육아 부담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처럼 행복한 부부가 없을거라 자신하는데, 돌아보면 ㅋㅋ 가까운 부부들 중 우리가 가장 많이 싸우는 것도 같아 머쓱해지기도 한다. 이전이었다면 요즘의. 오빠를 보고 "변했다. 역시 사랑은 그런거라"며 화내고 실망했겠지만, 요즘 나는 이상하게도 안도한다. 싫다고 말하는 J가 인간다워 보여서, 못한다는 말도 하는 걸 보니 이제 어디서든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사뭇 안심이 된달까..ㅎ정후를 키우며 "사랑은 부드러운 언어가 아니라 상대의 필요를 나눠지는 것"이란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됐기 때문이리라. 때론 투박해도 짜증스러워도, 서로를 향한 진심이면 충분하다고.. (물론 여전히 투정도 자주 하지만) 그렇게 굳게 믿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여튼...
이번 일을 겪으며
한가지 간과해왔던 사실을 깨달았다.
그간 나는 '희노애락'과 '생'까지만 묵상하고 누리고 부대끼고 그렇게 살아왔다는 사실. 삶에 분명히 실재하는 '로병사'에 눈 감은 채로. 언제든 누구에게든 다가오는 '늙어감' '병듬' '죽음'을 나와는 당장 상관없는 일로 치부하며 살아왔구나. 내 하나님 역시 '희노애락과 생' 정도에 머무른 분이었구나 싶었다. 하나님은 '노병사'에도 실재하시는 분이시다. 때마침 김병년 목사님의 「바람 불어도 좋아」를 읽는 중이었다. 셋째 아이를 낳은 지 며칠만에 뇌경색으로 쓰러진 아내, 세 아이를 키우고 목회하고 아내 병간호를 해온 오랜 세월동안 깨닫게 하신 고난과 고통에 대한 신앙 고백이고 삶과 믿음에 대한 찬가.
'삶의 여정으로서의 믿음은, 소유하지 못하고 잃어버려도 그분을 향해 신실하게 나아가는 것이다(25p)'
'내가 경험한 인생은 늘 안정과 불안정이 뒤섞인 인생이다. 영광과 수치가 함께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인생을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고 했던가. 수치, 불안정, 질병을 갖고 싶은 사람은 없지만,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불가피한 고통을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악으로 치부한다....그러나 고통이라는 가시를 떼어내고 행복이라는 꽃만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34p)'
세상에 너무나 염치없고도 이해불가한 고통과 고난등이 존재하는데, 애써 내 영역만큼은 사수하기를 바라면서. 별일 없는듯, 내 일 아닌듯 그렇게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신앙이란, 어떠함에도 그 분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분명 홀로 독대해야만 하는 길임과 동시에 이웃과 동역자의 손을 꼭 잡고 걸어야 하는 공동체적인 길이기도 하다. 가장 첫 걸음이 부부고 가족이고, 가장 첫 시작점이야말로 생로병사를 사실적으로 받아들이고 차근히 수용해가는 것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의 고통과, 또는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이별만큼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 또 있을까 싶어졌다.
후를 유모차에 태우고 팔짱 끼고 걸어가는데, 신호등에 서 계신 할머니가 민망할 정도로 우리를 쳐다보신다. 내 배 한 번, 정후 한 번, 부부 얼굴 한번씩. 그리고는 깊게도 웃으셨다. 그 그윽한 눈빛, 그 진한 미소를 보면서..
그 때 생각했다.
..어쩌면 가장 달콤한 맛의 정점을 맛보고 있는지도 몰라..
양가 부모님과 만나고 헤어진 날이면 꼭 마음이 쓸쓸해진다. 뜨겁게 웃고 사랑하지만 각자 자기 터전으로 다시 헤어지는 일상. 양가 어른들 나이들어가시는 모습에, 한 없는 섬김에 괜시리 코끝이 찡하다. 그럴때마다 생각한다. '나에게도 곧 아들과 온종일 보낼 수 있는 하루에 감사해마지 않는 오늘이 오겠지' 우리 엄마처럼, 어머님처럼.. 그러면 다시금 새삼스레 남편이 소중해진다.
물론 어젯밤에도 우리는 싸웠다.
회의 마치고 오니, 네시간 가까이 불끄고 누워 만화를 봤다는 부자. 할 말을 잃고, 화가 나 잠을 못 이뤘다. 하루 종일 정후와 정성껏 뛰어 노는 나는 뭐지.. 우리는 어디부터 생각이 다른거지. 장장 네시간 미동없이 티비만 본것도 화가 나지만; 차라리 쉬지도 못하고 애를 본 것도 아닌 그 애매함, 비효율성에 너무 화가 났다. 후를 재우고 서로 날을 세우다 해가 뜨기 전에 극적으로 화해하고 잘 잠들었다.(고 믿는다ㅋ)
후가 아빠게 묻는다.
"엄마랑 내가 보여 막 웃었어? 이제 안 아파? 또 아프면 나랑 엄마랑 떨어져서 병원에 또 가야겠네"
오래오래살아야해. 평균연령으로 치면 14년은 더 살아야 나랑 같이 죽는거.
재혼도 못하게 만들어 놓고..먼저 가면 끝까지 좇아간다. 나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