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성실 May 24. 2018

20180524 다시 읽는 (악착같이) 육아일기

20170529 영원한 아이

오늘 아침, 아이들이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출근한 아빠와 인사를 나눈다. "안아주고 뽀뽀." 매일 반복되는 나름 성스러운 의식. 아빠하고 한 번, 엄마하고도 또 한 번.


인사를 마치고 돌아 선 둘째가 대뜸 내게 달려들면서 손가락으로 찌르는 시늉을 했다. "위~잉. 엄마. 벌! 벌! 벌 이야. 코옥 꾹." 바닥에 떨어져 있던 벌 스티커를 보고 내게 장난을 걸어오는 아이. 그 장면을 보고 있던 큰 아이가 내게 안기며 속삭였다.

"벌도 엄마가 예쁜 줄 알고 달려와서 엄마를 찌르네에? 그치. 준후야. 엄마가 꽃인 줄 알고."


아주 아주 간만에 찾아든 달콤한 멘트에 내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간다. 아닌 줄 알면서도, 이내 바뀔 줄 알면서도. 아이들 입에서 나오는 진심어린 사랑의 고백이 내 안의 어린아이를 껴안는다. 부모가 된 나 역시 누군가의 사랑과 포용이 필요한 또 한 명의 어린 아이.


물론 아이들은 그 잠깐의 달콤함조차 무색하게 수시로 소란스러웠고 나 역시 언성을 높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아이는 나를 기다려준다. 나 역시 몹시 바쁜 와중에도 수시로 아이를 기다리고 그리워한다. 아이들 사진을 넘겨보며 남몰래 기운을 충전하면서. 그러다가도 막상 아이를 만나면 티격태격 끊임없이 좌충우돌하지만서도. 그럼에도 때론 나 자신보다도 엄마인 나를 더 사랑해주는 아이의 품에서 위로를 받는다. 잠시 머무른다.


사랑은 또 다른 사랑을 낳는다. 나에게 사랑이 부족하다 느낄 때  "더 많이 사랑해야한다."고 자책하지 않고 "더 많이 사랑받고 싶다."고 솔직해지기. 그리고 사랑을 구하기. 때론 아이의 품에서 벗과의 차 한 잔에서,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서 사랑을 구하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


<20170529>

"엄마에게 들려줄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어.

오늘 산에 다녀오는 길에 엄청 빨갛고 예쁜 열매를 모았어. 내가 엄청 열심히 모으고 있는데 옆에 또 진짜 큰 나뭇잎이 있는거야. 그래서 빨간 열매 꼭지를 나뭇잎에 찔러서 예쁜 꽃처럼 만들었지. 엄마가 좋아할 것 같아서.... 내일 공동육아 방 가서 꼭 가봐. 내가 일부러 챙겨놨거든.


어때?

진짜 아름다운 이아기지?"


그리고 잠든 큰 아이. 여운을 곱씹는데 사진이 도착했다. 그 작업을 하고 그렇게도 좋아했다고.

아이가 나를 위해 만들어 준 꽃.


요즘 날이 좋아 아이들과 자주 산에 갔다. 제법 커버린 녀석들과 꽤 비탈진 곳까지 오가니 기분이 참말 묘했다. 조심 조심 외치지 않아도 저 알아서들 조심하고, 낙법을 알려주니 저들끼리 하하호호 신이 나 난리들이다.


감나무꽃을 주어 팝콘꽃이라 칭하면서 그걸 또 뱀딸기 안에 일일이 꽂아 디저트 놀이를 한다. 아이들의 활동을 보고 있노라면, 언제까지고 이들의 호기심과 열정이 꺼지지 않게 지키고 싶단 사명감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훌쩍 커버려 나보다 친구를 더 좋아라 하는 큰 아이 모습에 없지 않아 서운하고 아쉽기도 하다.

감나무와 산딸기의 조합
나뭇잎꼬치를 만든 아이들


이십대를 관통하고 흔들었던 주요 이슈 중 하나가 관계와 독립이었던만큼, 내 아이들에게만큼은 충분히 안정감을 주는 부모가 되고 싶었는데.....


부모가 되고 보니, 더욱이. 부모님께 받은 것들이 그분들의 최선이었음을, 그걸 뛰어넘는 것들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어서. 가끔씩 아린 마음을 토닥이게 된다.


다들 저마다의 어려움을 딛고 자라가는데, 나만 너무 한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던건 아니었을까. 툴툴 털고 쿨하게 넘길 법도 했던 일들을 너무 오래 붙들고 씨름한 건 아니었나 싶어서 후회 한 모금,


나의 문제에 갇혀서 충분히 헤아리지 못하고 내뱉았던 모진 말과 감정들에 미안함 한 움큼,


나는 다른 부모가 되리라 수도 없이 다짐해왔지만 그만큼 엄마만큼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아버려서 가끔은 두렵다.

아이들과 함께 앞 산으로 산책. 아이 눈에 비췬 엄마와 친구들.

내가 그랬듯이.

엄마의 최선과 무관하게.

아이가 느끼게 될 감정들, 결핍, 상처. 이런 저런 무겁고 거추장스러울 것들이.


심지어 엄마인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나 모르게

자라고 움트고 또 낫고 그러다 덧도 나고.


그럴거란 생각에 마주하면.


다른 엄마가 되리라 마음 먹던 내 오만함과

다를 수 있다고 믿었던 내 지나친 확신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만다.


다 주면 될 것 같았는데.

제 아무리 부모가 다 준다해도.

사람과 사람 사이엔

저마다의 눈물이 아쉬움이 남는거구나 싶어서.


아이가 자랄수록.

더 자신이 없어진다.


그럴수록 더욱이.

그 어떤 것으로든 아이에게 기대지 말아야지 마음을 다잡는다.


아이는 아이고 부모는 부모인데.

가끔은 아이의 위로와 감성에 기대.


아이가 되고 싶어진다.


나도 사실은 부모가 처음이라고.

여전히 다 큰 자식 걱정 뿐인 우리 엄마 앞에선

더 이상 울고 싶지 않아서

엄마 앞에서도 아이 앞에서도 울지 못하고

홀연히 멈춰 서 큰 숨 들이쉬고.


여전히 어렵고 낯선,

그래서 벅찬 엄마 자리로 돌아가 지키고 서서.


다시금 이들이 선사하는 하염없는 기쁨의 자리를 누리는 나는.


영원한 아이가 아닌가.

어른이 된 우리 안에도 여전히 어린 아이가 살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20180519 악착같이 육아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