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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따라갈 수 있게, 딱 그만큼만 천천히-

20170413

by 조성실

작년 이맘때만 해도 까치발로 겨우 11층 닿을까말까 하던 손끝이었다. 하원길에 보니 어느새 큰 녀석의 오른 손 검지가 당당히 13층을 누르고 있다. 우연히 눌러놓고 저도 놀라 나를 본다.

한 쪽 눈을 못 떠 우리를 애타게 만들던 갓난쟁이, 고 작은 녀석이 어느새 두 눈 부릅뜨고 베란다도 넘고, 신발장은 물론 화장실도 휘젓고 돌아다닌다. 내 도움 없이도 홀로 서 몇초씩이나 버틴다.

아이가 뱃 속에 자리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출산과 육아는 줄곧 '진퇴양난', '낙장불입' 퇴로가 차단 된 길이었다.

출산을 코 앞에 두고 떨던 내게 선배 엄마가 말했다. "앞서 간 모든 엄마들이 결연히 출산을 해낼 수 있었던 건, 진퇴양난이기에 어쩔 수 없이"였을 거라고. 그 말을 들은 순간 어렴풋이나마 앞으로의 날들을 직감했다. 물론 실전은 상상 그 이상이었지만.

출산과 육아를 전투와 화투 용어에 빗댔지만 물론 그 모든 시간이 비장함으로 점철된 것만은 아니었다.(분명히 해둔다.)

카스를 통해 그간 공유했던 수많은 일기들은 거지반 사랑과 환희와 눈물로 점철돼 있다.

아이가 태어난 순간 내 세계는 사과의 반쪽처럼 갈라졌는데, 그야말로 모든 것들이 달라졌다.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가짐, 뉴스를 해석하는 시선, 내 자신과 주변에 대한 인식 전반에 걸쳐.

충분히 기뻐했고 충분히 행복했다. (물론 적지 않은 댓가를 지불하기도 했지만. 그 모든게 아깝지 않을 정도로 아이와 함께 한 시간들이 소중했다.)

나를 새로운 세계로 몰아 넣은 아이.

그 아이가 어느새 커 스스로 자전거를(비록 네발이지만;) 타고 엘레베이터에서 제 집을 누른다. 두번째 아이마저 스스로 걸어나갈 채비를 시작한다. 아이들이 한시도 쉬지 않고 껑충껑충 자란다. 이들이 자라는걸 바라보면서, 내 자신에 대한 생각들 역시 바지런히 출렁인다.

나 뿐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엄마들이 하는 고민일테고, 아이엄마&전업주부로 살고 있는 나뿐 아니라 서른즈음을(물론 이미 넘었지만) 지나는 동시대 많은 이들의 고민이리라 싶으면서도.

잘 가고 있는건지 부던히 의심스러운 봄날이었다. 아무런 사회적 책임도 하고 있지 못한 것 같아, 소시민으로서 나, 갇힌 신앙인으로서의 내 자신에게 뜨거운 가책을 쏟아내는 날들이랄까.

분명 벚꽃이 지천인데, 봄날이 잊지도 않고 또 왔는데 우리 아이들 얼굴엔 밤낮으로 봄이 찾아드는데 요 며칠 내 얼굴만 사나웠다.

잔소리 폭탄을 수시로 맞은 후야(큰 아들)가 입을 삐죽이며 외쳤다.
"엄마만 왜 짜증내? 나는 못 내게 하면서!"
어떤 날은 같이 외식하는데 나 들으라는듯이 아빠에게 귀엣말을 했다.
"아빠. 엄마는 놓고 올 걸 그랬다 그지? 자꾸 짜증만 내는데."
정곡을 찔려서 아팠다. 그치만 한켠으론 당당하다.

왜냐고? 엄마도 사람이니까!
격렬했던 우리 시간만큼이나, 바삐 네 세계로 발 내딛는 네 열정만큼이나, 개인으로서의 내 자신도 소중하니까.

며칠 전 아침, 후야 재잘거림에 기분 좋게 눈을 떴는데, 어이없게도 '어둠의 시간'이란 단어가 뇌리를 스쳤다. 지난 4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나를 지배한 감정은 분명 환희였는데, 둘째를 낳고선 무거운 감정이 불시로 나를 찾는다.

아무 것 안 해도 그저 예쁜 둘째. 그런데 문득씩, 너무나 역설적이게도 그 둘째가 그나마 내게 남았 있던 실오라기 같은 사회적 정체성을 말끔히 지워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더 없이 작아진다. 무엇보다 이 아이들 누구에게 맡기고 나갈 수 있을까 싶어서. 사회적 커리어와는 별개로 어떻게든 외벌이로 버텨올 수 있었던 지난 시간에 감사하면서도 한켠으론 커다란 부채감이 밀려온다. 같은 꿈을 꾸었는데 부던히 성취해왔는데, 아이를 낳는 순간 자연스럽게 더 많은 걸 포기해야만 하는 엄마로서의 앞날에 대해. 막막함이 밀려온다. 딸만큼은 다를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엄마에게 본의 아니게 날렸던 배신이 내 아이들에게마저 물려질 걸 생각하면 끔찍하다. 이래서 첫 아이 때보다도 두번째 출산 후 산후 우울이 더 쉽다고들 하다보다.

같은 꿈을 꿨고 부던히 성취했고 노력하면 도달할 수 있을거라 믿었던 많은 것들과, 모르고 헤쳐왔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수많은 유리천장을 여실히 깨닫는 요즘.

조심스럽게 기지개를 편다.
오랫동안 안 쓰던 근육을 편다.

아이들과 함께 해 온 일상의 삶에서 부던히 배웠고 연마했던 내공을 복기해본다.

노트를 펴고 써내려간다.

일기장을 채웠던 수많은 일상 뒤에서, 진퇴양난의 그 길에서 쿵푸팬더마냥 나도 모르게 연마해 온 수많은 근육들.

그제서야 무릎을 친다.
아이만 자라온게 아니었구나.

아이와 함께 나도 부던히 자라왔구나.
혼자서 어려우면 함께하면 되는거구나.
안되면 될 때까지 계속하면 되는거겠구나.
진퇴양난, 낙장불입의 자세로 심정으로.

제 아무리 진보적인 지식인도 쉽게 뛰어넘지 못하는 시대적 한계가 존재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한계점이 있다. 그럼 어떻게 하나? 다음 세대가 받아하면 될 일이다. 현재에 좌절하기보다, 그 한계를 딛고 서 한 발작 더 내딛기로 부던히 용쓰면 된다. 그게 최선이다. 내 부던한 노력에 비해 변화가 지독히도 미미할지라도, 그마저 없으면 도태될 걸 알기에 부던히 용쓰는 일, 그게 다음 세대를 걸어가는 후배들의 할 일이다.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될 수 있도록 후배 된 길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용써야겠다.

잠들기 전 후야에게 사과를 건네는 나.
지난 몇 주간 엄마가 미안했어.
입을 삐죽이더니 내게 와 안긴다.
그래. 너도 참 애썼다 싶다.
본래 그런 것이다. 네가 아플 때 우리가 밤잠 못자듯이 가끔은 엄마 마음앓이에 너도 옷자락 한귀퉁이 들어줘도 되는거 아니겠니. 자위하면서.

자전거 타고 한껏 웃던 아이 모습이 스쳐지난다.
많이 컸다 했은데 여적 그래도 품 안의 자식.

괜히 배시시 웃음이 난다.
천천히 자라라.
너무 빨리 말고.

엄마도 부던히 따라갈 수 있도록. 딱 그만큼만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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