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들레헴아 너는 결코 작지 않도다.
머릿 속이 복잡하고 작업이 잘 풀리지 않아, 가만히 앉아서 아이들 사진을 더듬어본다.
배시시 엄마 미소에 젖어든다.
아이들은 왜 이토록 아름다운걸까.
미치게 힘들었던 순간, 내 밑바닥이 훤히 드러나는 순간을 굽이 굽이 지날 때조차도
아이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하염없이 내 자신이 초라해질 때, 아이들과 뒤엉킨 일상의 분주함에 밀려 입에서 불이 쏟아져 나올 때, 한껏 예민하게 발톱을 세운 채 엄마 괴물이 되어버리는 순간들에도 나는 안다. 그 순간 나를 힘들게 하는건 아이들이 아니라는걸. 그 순간 나에게 필요한 건 '좀 더 말 잘듣고 좀 더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아니라, 아이들이 뿜어대는 빛과 여전한 아름다움에 집중할 수 있을만한 '찰나의 여유'다. 그 여유를 잃어버리는 순간, 내 초라한 한계가 드러나고 사랑은 고갈된다.
사랑한다는 말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진짜 사랑을 찾고 경험하기가 얼마나 어렵던지.
하루에도 수차례 "사랑합니다, 고객님" 같은 부담스러운 피드백을 주고 받는 우리에게, 저 멀리 이국에서 고통받는 절대적 약자인 누군가를 사랑하고 후원하는 건 차라리 쉽다. 육아 예능에 나오는 다른 아이를 한없이 귀여워하고 사랑하는 건 쉽지만, 하루에도 수십번 우유를 엎고 나에게 안기고 내 일거수 일투족을 제어하는 내 아이를 사랑하는 일은 쉽지 않다. 전자는 본능적으로도 가능하지만, 후자는 노력이 필요하다(역설 중에서도 이런 역설이 없겠지만, 사실이다). 낯선 여행지에서 만난 누군가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고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는 일은 차라리 쉽지만(물론 이것도 기적에 가깝겠지만 ㅎㅎ) 서로의 생리주기와 체취에 익숙해진 부부가 서로를 애틋하게 껴안는 일은 더 큰 노력을 요구한다.
정작 중요한 건 관념에 머무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일상적 실천이고, 사랑의 실천은 서로의 체취를 뜨겁게 껴안을 때에만 발생한다. 다시 말해 체취를 맡고 참고 견디는 과정을 거치며 완성된다. 가족의 사랑이 뜨겁다 못 해 찐득거리고 지긋한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사랑의 진짜 얼굴은 어쩌면 지독히 일상적이고 지겹기까지 한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자라는 순간들은 종종 내 유년의 결핍과 잇닿고, 나를 미치게 하는 아이의 어떠함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내 일면과 놀랍도록 닮아 있기에, 아이를 부둥켜 안는 일은 아이를 안는 일인 동시에 내 자신을 안고 위무하는 일이다. 그래서 제 자식 안 예쁜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정작 건강하기 자식을 사랑하고 보듬는 일이 그 어떤 사랑의 실천보다도 더 어렵다. 회피하고 싶은 갈등을 직면해야 하고, 피해왔던 장면을 즉시해야 하기에.
그런 의미에서 육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자산 중 하나는, 서로에게 심리적 지지와, 시간적 지원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공동체의 확보다. 내가 내 아이를 받아주지 못하는 순간 다른 이가 내 아이를 받아주고, 내가 내 자신을 껴안지 못할 때 다른 누군가가 내 어깨를 다독여 줄 수 있는 공동체. 서로의 결을 맞추다 열폭하고 무척이나 짜증스럽다가도 그런 영화같은 장면이 내 현실이 되면, 날카롭던 마음 결이 보드라워지면서 비로소 사랑이 들어설 자리가 생긴다. 그럴 때에 비로소 아이들로부터 품어져나오는 아름다움, 그 장관의 경이로움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아이들은 내게 영감이 되고, 뮤즈가 되었다. 그래서 가끔은, 아이들에게 더 나은 환경, 부모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이 아이들이 필요해서 우리가 만나게 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자라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나고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을 기억하지 못하게 된대도 아이와 또 공동체와 함께 했던 주옥같은 매일이 우리의 기억과 숨결에 여전히 살아있을걸 알기에. 그래서 더 애틋하고 간절하게 다시 없을 아이들과의 시간을 열망하고, 그 시간을 가능하게 해주는 공동체와 은혜를 갈망한다. 그리고 나 뿐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은혜와 사회적 자산을 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정치하는 엄마로 살아가는 주된 이유 중 하나.
얼마 전 지인이 내게 물었다.
"아이에게 굉장히 애틋하신 것 같아요."
내가 답했다.
"네. 제가 좀 자식 덕후인 것 같아요."
우스갯소리로 답했지만, 사실 육아(育兒)의 과정은 내게 곧 육아(育我)의 여정이었다. 아이와 함께 이동약자가 되면서 그간 내가 당연하게 누려왔던 것들이 누군가에게 얼마나 절대적이고도 필요한 것이었는지 알게 됐고, 아이의 반응과 질문을 마주하면서 차별을 정당화해왔던 그간의 내 세계관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여실히 깨달았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의 엄마란 수식어가 나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런 수식 없이는 나를 설명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아이를 키우는 전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내 인생에 매몰돼 있던 시선이 더 넓은 세계로 확장되었다. 부모가 되어 아이를 품으면서, 상처 받지 않은 인생이 불가능하단 사실을 알았고, 내 인생만 안쓰러운 줄 알았는데 사실은 인생이란 것 자체가 비루하고 초라하기 마련이란 진리를 깨달았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과정 속에서 나 아닌 다른 이를 사랑하고 위로할 힘을 얻었다. 그 은혜에 힘입어 빛과 위로와 사랑이신 하나님을 깨달아 가게 되는 신비를 경험 해 온 시간들.
인생의 비루함을 알지 못하는 이에게서 풍겨나는 해맑음이 때때로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인생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외치는 인간존엄이란 구호가 어떻게 자성 없는 이기적 외침이 되는지도, 엄마가 되고서 깨달았다. 그간에도 또 여전히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상처를 주었을 거란 사실에 경각심을 느끼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의 연장선 상에서 지난 성탄과 연말을, 예수님이 왜 하필 더러운 말의 밥그릇(말구유)에 오셨는지, 그런 의미에서 말구유가 없는 성탄이 얼마나 얄팍하고 가벼울 것인지 오래도록 곱씹으며 보냈다.
그러던 중 마침, 2017년 성탄 주일 어린이 설교를 맡았다. '말구유로 오신 예수님'으로 아이들과 말씀을 나누었다.
"나는 누구일까요?
나는 침이 많이 묻어있고요, 더럽고 냄새도 난답니다."로 시작해, 말구유의 입장에서 아이들에게 나를 설명했다. 베들레헴이란 작은 고을, 그 곳에서도 누추하기 짝이 없는 말구유로 오신 아기 예수님의 나심을, 그 기쁨을 아이들과 나누고 싶었기에.
하나님 나라를 향해 살겠다는 결심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나는 내 안의 욕망을 마주하고
나를 실망시키고 기대하게 하는 여러 사건들을 만난다.
베들레헴아, 너는 결코 작지 않도다.
하신 그 선포를 열망한다면서도
가끔은 누군가 나를 베들레헴이라 부르진 않을까 날이 서고, 자존심이 상한다.
하나님 앞에선 베들레헴의 복을 누리고,
사람들 앞에선 예루살렘 궁전 헤롯의 영광을 누리고 싶은 욕망이 교차할 때
그런 내 자신이 초라해 눈물이 날 떄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신다.
베들레헴아, 너는 결코 작지 않도다.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길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일상이,
왜 좁은 길이어야 하는지
어떻게 낮은 길로 이어지는지.
그리고 그 길에 임하는 총천연의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를.
다시 보게 하신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가 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부유한 자가 되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말이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의 저의 것이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위로를 받을 것이란 주님의 약속은.
내게 아이들의 존재와 함께 온다. 그렇게 아이들이 내게 영감이 된다.
아이들이 이토록 아름다운 건
우리 사회에 끊임없이 기회를 주기 위함이 아닐까.
잃어버린 유년을 회복할 기회
뜨겁게 사랑해 볼 기회
맥락 없이도 미소지을 수 있는 기회
내 자신을 성찰할 기회
서로의 결을 맞춰갈 기회
사람의 아름다움에 눈 뜰 기회
그 기회를 붙잡을 여유가 없는 사회. 아이가 민폐인 사회. 아이 낳는게 지옥인 사회.
누구도 해결할 수 없다고 희망을 접는 사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어쩌면 기대를 버리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무언가 달라질 수 있다는 기대를 버리고.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장황한 희망을 내려놓고.
그저 묵묵하게.
내가 바꿀 수 있는 것
내가 선 이 한 평의 땅. 내가 만날 딱 그 반경의 사람들일 뿐이라고.
그 변화만이라도 얻어내면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묵묵히 하루를 살아내는 일.
포기하지 않고 딱 한 걸음을 내딛는 일.
그게 2018년 내게 주어진 사명일지도.
새해에도 변함없이 가장 작은 마을 베들레헴을 부르신 하늘의 축복이.
말구유로 임하신 아기 예수의 은혜가.
성탄의 의미가
내 삶과 내가 만날 사람들의 하루를 비추길.
Happy New Y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