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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성실 Jun 23. 2018

나 너의 너른 대양이기를

20170224 악착같이 육아일기

간만에 정후가 컨디션 난조다.

한동안 의젓함에 애틋하기만 했는데. 엄마의 임신 이후로 너무 훌쩍 커버린 것 같아 미안하고 아쉽기만 했는데.. 간만에 후의 날 것의 짜증, 날 것의 화를 만나 당황스럽고 곤두서는 나.


어제 아이를 보내놓고 일필휘지로 반성문을 내려써고 아이와 나름 하루 잘 보냈다 생각했는데... 백만년만에 자다 깨 숨 넘어가던 정후가.. 나를 거부했다.


와르르르.

이상한 기분.

아빠를 찾는다.


엄마가 짜증을 받아주질 못할 상태인 걸 직감한 아이가 비빌 언덕을 찾아 아빠에게 안겨 흐느끼고 발버둥치는데.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 작아졌다.


아이가 사방으로 버둥거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 대양이고 싶은데

현실의 나는

꽃발 조금 내딛는 아이의 머리끝에 휘두르는 팔끝에 너무나도 가까이 부딪히고만다.


사춘기를 늦게 겪은 나는.

정확히 말해 부모와 나를 다른 자아로 인식하고 인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덩 나는.


엄마를 여전히 사랑하지만.

가끔은 내 투정과 응석에도 엄마가 좀 더 단단하기를 바라고 아쉬워한다.


나보다 나를 더 걱정하고

나보다 나를 더 아끼는 엄마가


가끔은 조금 더 넉넉한 선배이기를 바란다.


내가 제아무리 투정을 부려도

별 일 아니라고

인생 다 그런거라고

조금만 지나면 괜찮다고

도전하라고

필요하면 안겨 충분히 울고 불안해하라고

그리고 다시 너의 세계로 가라고

말해주는 엄마를 기대한다.


엄마와 더 말이 통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순간 아빠에게 비밀을 건네는건

아마도 그런 배포(?)에 기대기 때문일게다.


정후가 넉넉히 짜증을 내도

가끔은 그래 너도 비빌 언덕이 필요하겠지 싶은데. 그러다가도 풀썩

아 아이가 나를 거부하는건가? 싶어 쭈그리가 되는 내 편협함에. 다시 풀썩.


아침에 정후가 말했다. 엄마가 짜증낼까봐. 엄마가 힘들까봐. 그래서 아빠에게 안겼다고.


아이에게 비친 내 도량이 그 정도인 것 같아 다시 기운이 빠졌다.


사랑 받으려는 부모는 더 이상 넉넉해질 수 없다. 아이는 나를 사랑하고 보듬어 줄 대상이 아니라 내가 사랑할 대상이다.


점점 힘이 빠지고 나이 들어가시는 부모님들 보면서. 뼛속 깊이.


절대로 자식은 부모 사랑을 알지 못하고

자식은 절대로 부모에게 받은 사랑만큼 되갚지 못한단 사실을 깨닫는데.


사랑을 기대하는 내 어리석음을 자조하면서도

순간이지만 괘씸함과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는 내 소인배다운 면모를 애써 토닥인다.


지친 마음을 공유하자 친구로부터 건네온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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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 -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 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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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가 나왔지만 여전히 첫 아이와 가는 길은 낯설고 긴장되고 어렵다. 너도 나도 처음인 길이라. 뒤돌아보면 잠깐일 걸 알면서도 왜인지 이 순간이 전부일 것만 같은 착각까지.


아이에게 제 공간이 생기는만큼

나에게도 내 공간이 확실히 서야한다.


밤새 꿈을 꾼다.


아이들이 아무리 버둥거려도 돌을 던져도 삼키는 대양인 나를.

작은 돌 하나에도 첨벙거리는 얕은 개울 말고.

넉넉한 대양을. 커다란 위험도 풍파도 결국은 삼키고 잔잔해지는 바다를.


내 몫을 절대로 아이에게 나누지 말 것.

아이가 건네는 위로와 공감에 기대지 말것.

환상을 깰 것. 아이는 아이인 것을.


벗이기 이전에 보듬을 양인 것을.


내가 여전히 부모에게 너른 품을 기대한단 사실을 명심하면서.

고작 나이 다섯인 이 아이에게 내가 얼마나 대단한 바탕인지. 전부인지. 기억하면서.


눈치보지 않는 아이로.

믿어주고

기다려주고

보듬고

반보만 딱 앞에 서서.


내가 그래왔듯.

이 아이들도 절대로 내 마음 알지 못할것을 늘 마음에 새기고.


아이에게 이해받고 싶을 때 나의 대양으로 더 깊이 침잠하는 것 밖에 도리가 없음을 새기며.


훗날의 정후.

이 글을 읽게될지도 모를 나의 아이.

엄마의 미숙함에도

그럼에도 내 최선이었음을 줄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었음을

뒤늦게라도 그 마음만큼은 기억해주기를.

부모가 돼 지칠 때 이 때의 내 고백이 네게 일말의 선물 같은 글이 될 수 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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