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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성실 Jun 22. 2018

철들지 않는 어른

20180622악착같이 육아일기

내 손으로 일군 것 하나 없이 결혼을 하겠다 했을 때,

사회인으로 자리를 잡기도 전에 엄마가 되고 싶다 했을 때,

나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다수의 사람들이 내게 말했다.

     

 "네가 아직 세상을 몰라서 그래. 서두르지 않아도 돼.  천천히. 조금만 더 천천히."

     

나를 더 사랑할수록, 내게 책임감을 크게 느낄수록, 일상에서 나를 생각하는 시간이 더 오랜 사람일수록, 나를 뜨겁게 붙잡고 계속해 되물어왔다.

“정말 괜찮겠어? 세상은 그리 녹녹하지 않아.”

     

그러나,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나는,

사람은 각자 자기 먹을 몫을 타고난다는 소신으로,

내 갈 길 나는 잘 몰라도 그 분은 나를 더 잘 아실거란 믿음으로 무모하게 여기까지 왔다.

     

우리 젊으니 이 또한 추억이 되리라던 나의 고집이 머쓱할정도로, 부득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준 수많은 이들이 있었기에, 돌아보면 궁핍을 경험하지 않고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항상 감사하고 가끔은 속이 시린다. 결국 나를 돌봐준 사람들 그들의 노력에 (결과적으로) 기대왔단 생각이 들어서. 나 하나 나 살고 싶은대로 살았지, 결국은 그런 나를 참지 못한 이들은 자신의 주머니와 시간을 들여 우리를 돌봐주었다. 그런 사실을 자주 생각한다. 그럴 때마다 나의 철없음에 일종의 부채감을 느낀다. 그럴 때면 스스로가 작게 느껴진다. 나는 왜 여적 철들지 않는 어른으로 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언제쯤 제대로 철 들 수 있는 것일까 하면서. 남몰래 쭈그리가 된다. 그런 와중에도 나의 본심은, ‘절대로 철들고 싶지 않아!’, ,그냥 이대로 나일 순 없는걸까,‘하는 식의 절규, 그리고 자기 긍정.

     

‘그래. 이게 나인걸.

생활지능은 낮아도 그래도 나로 인해 오늘 하루 세상은 조금 덜 나빠졌을 거야.’

하고 스스로를 격려한다.

     

‘오늘 하루 나로 인해 사람의 온기를 느낀 누군가가 있을테니.

그와 나눈 대화, 그에게 건넨 눈짓 하나에서 나는 오늘 내 할 밥값을 다 한 것‘

이라 생각하며 자긍심을 갖는다.

     

굳이 항변을 하자면, 나의 철없음도 꽤 여러 방면에서 쓸모가 크다. 특히 육아를 할 때. 철들지 않는 어른일수록 아이들에게 (더) 크게 사랑 받기 때문에, 일종의 소득이라면 소득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나는 고소득자인걸까. 아이들의 세계에선, 철부지 일수록, 자유로울수록, 더 많이 환영받기에. 아이들보다 더 신나게 뛰어놀 때, 내 안의 어린아이, 정확히 말해 여적 철들지 않는 어른 아이가 튀어나와 저들과 함께 벗한다. 작은 스승들은 그런 나를 기꺼이 환대하고 자신의 세계에 끼어준다. 그럴 때의 짜릿함이란.

     

그런 순간엔 이런 안도가 절로 나온다. “휴우. 철들지 않은게 얼마나 다행인지. 이런 큰 행복을 놓칠 뻔 했어.” 그러다 가끔은 아이들과 서로 감정을 치받기도 하지만, 그렇게 서로를 키워갈 수 있단 것 자체가 인생의 큰 기회다. 철들었지만 자라지 않은 어른이 얼마나 많던가!

     

며칠 전 밤이었다. 아이들을 씻기고 모두가 소등한 밤.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과 천장에 붙은 야광별 두 개만이 반짝이던 밤. 큰 아이가 말했다.

“엄마. 우리 집엔 딸이 없네.”

만나는 이웃들이 자주 “아이고. 아들만 둘이여?”라고 묻고, 이제는 저가 먼저 “네. (우리집에) 딸은 없고요.”라고 나 대신 받아쳐 주는 아들이었다. 여동생을 바라고 있나 싶어 물었다.

“그렇네. 왜? 후야도 여동생 갖고 싶어?”

잠시 머뭇거리던 아이가 답했다. “응.” 그러다 이내. “아니다. 아니. 동생이 한 명 더 생기면. 아휴. 계속 기다려야 하고 양보해야 하고. 지금보다 더 힘들어지잖아. 그냥. 동생은 뚜뚜로도 충분해.” 그러다 약간은 아쉬웠는지. “그래도, 튼튼이 형은 여동생이 둘이나 있네. 뭐. 있으면 좋겠지만 힘들기도 하겠네.”

     

어둠 속을 오가는 아이의 조잘거림, 들숨과 날숨처럼 형아의 말 사이 사이에 끼어들어오는 둘째 아이의 추임새를 마음에 오롯이 새겨본다. 그 아름다움에 취해 나도 모르게 숨겨뒀던 진심을 뱉아버렸다.

“근데. 만약 여동생이 생기면 말이야. 아빠랑 후야랑 뚜뚜랑 모두 다 여동생만 좋아하면 어떻게 하지? 엄마는 덜 사랑하고 말이야.”

내 입으로 뱉은 말이었지만 나도 내 귀를 의심했다. 뭐지. 내 무의식에 숨겨 있는 말이었던건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 정신이 또이또이 했다면 무슨 그런 말이 있느냐고 웃어버렸을 말이 내 입으로 튀어나왔다. 나를 사랑하는 아빠. 딸에겐 최고의 페미니스트이지만, 아내에겐 가부장제의 전형인 아빠를 보며 가졌던 두려움인걸까. 순간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남몰래 머쓱함을 주어담는데, 어느새 아이가 내 곁으로 바짝 더 다가왔다. 그러더니 읊조리듯 말한다.

“엄마. 무슨 그런 바보 같은 말이 다 있어. 그건 정말 바보 같은 말이야.”

     

나를 가르치는 아이의 말에 나도 남편도 한참을 폭소했다. 맞네. 맞네. 자주 느끼지만, 대체로 내 말보단 네 말이 맞네. 오늘은 더 그렇네.

“그러게 말이야. 엄마는 무슨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을까.” 남편이 나를 놀린다. 그 사이 아이가 예고도 없이 훅하고 허를 찌르며 들어왔다.

“여동생이 생겨도 우리는 엄마를 계속 사랑하지. 맞지?”

     

아이와 나눈 말들. 그 마약같은 순간들. 예고도 없이 허를 찌르고 훅하고 들어오는 아이의 심장 저격 멘트들.

     

이 순간 뿐 아니라, 셀 수 없이 오랜 밤, 많은 순간에 걸쳐, 철들지 않은 아이가 철들지 못 해 두려워하는 나를 위로해왔다. 철은 들지 않았지만, 철든 어른보다도 더 단단하고 덜 부서진 아이의 세계가 나의 부서진 세계를 이어 붙이고 푸르고 싱그러운 저의 세계로 나를 접붙여주었다. 내가 저를 낳았지만, 저가 나를 돌보고, 그런 저를 내가 돌보고, 그렇게 우리 함께 자라가고 있으니, 생각해보면 철들지 않은 채 엄마가 된 내가 참 받은 복이 많다 싶어진다.

     

며칠 전 공동 육아에서 아이들과 외출을 했다. 마음에 드는 돌을 고른 후, 그 돌을 스케치북 삼아 각자 물감으로 채색을 했다. 저마다 돌의 특징을 잡아 원하는 바를 잘 그려냈다. 청명한 햇볕과 무성한 나무 아래서 굴러가는 말똥만 보고도 데굴 데굴 구르는 아이들을 보고 있을 수 있는 그 순간이 어찌나 소중하던지. 작업을 마치고 얕은 산을 지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이들이 수다를 시작했다. 작지만 건강한 대여섯살의 친구들에게 사뭇 진지하게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한 서른 세 살의 나.

“있잖아. 나 요즘 고민이 있는데.”

“뭔데, 뭔데요?”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자꾸만 후야랑 뚜뚜에게 화를 내게 되는거. 왜그럴까?”

‘화 내기 싫은데 화가 나서 고민인 친구 엄마’의 이야기에 저마다 할 말이 많아졌다. 친구 엄마이면서 자신의 친구이기도 한 나의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아이들.

“어! 성실 이모도 그렇구나. 우리 엄마도 그런데. 우리 엄마는 아침마다 화를 냈는데. 요즘은 안 내. 그래서 좋아.” “우와. 좋겠다!” 아이들의 부러움을 받는다. “그래도 가끔은 내.” 서로의 집사정을 꽤 잘 아는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한참 신났다. “맞아 맞아.” “그래 그래.” 너네 엄마도 그렇구나.“ ‘얘들아. 나도 실은 너희 친구 엄마거든.’하면서도 나를 크게 의식하지 않고 저들 할 말 하는 아이들에게 고맙기도 하던 터에, 한 아이가 내게 위로를 선사했다.

“나는 성실 이모 안 무서운데? 성실 이모가 제일 안 무서운데?”

전보다 쉽게 화를 내는 내가 무섭지 않았냐고, 혹 그랬다면 미안하다 사과하는 나를 아이의 말이 다독인다. 거짓말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진짜? 이모 위로해주려고 일부러 말하지 않아도 돼.” 아이가 정색하며 내게 답한다. “아닌데? 진짠데? 진짜 화 안 내는 것 같은데?(휴. 다행이다. 나는 화가 났었는데 너희는 몰랐나보구나.)" 그리고 시작된 그 날의 인기투표(매일 바뀔 것 안다. 얘들아.) 두 아이가 내가 가장 안 무섭고 가장 재밌는 이모라고 말했다. 그게 뭐라고 어깨가 삼센치는 올라갔다. 나 이런 엄마야. 재밌는 엄마. 훗. 내가 철은 좀 덜 들었어도, 세상 물정은 몰라도, 이렇게 사랑 받는 엄마라고. 훗훗훗.

     

내 아이는 사실 요즘 엄마에게 불만이 적지 않았던 것 같은데, 다른 아이가 엄마에게 인기투표를 몰아주자 그걸 의식한건지, 정말 본심이었던건지, 어쨌든 나를 ‘가장 재미있고, 가장 안 무서운’ 엄마로 꼽아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이었던가, 다다음날이었던가. 며칠 안 지난 아침, 아이가 뱉은 한 마디.

“우리 엄마는 정말이지 ‘나중에쟁이’야.”

동생 때문에 안된다며, ‘나중에’, ‘나중에’, ‘좀 있다’를 연발하는 나의 뒤통수를 때리는 한 마디. 치. 그래도 네 마음 제일 잘 알아주는 사람이 나 말고 더 있더냐. 유치하게도 내가 맞대응을 했다. “맞아. 대신 아빠는 ‘안돼쟁이’고.” 출근한 아빠, 괜히 소환한 철 안든 엄마. 이렇게 유치한 엄마가 있을까. 아이는 크게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별 일은 없었다. 다만 내 양심이 남편에게 미안했을 뿐. (이내 곧 다시 깔깔깔 했지만)

     

“엄마는..나중에 쟁이야.” 그 말이 뭐라고 괜시리 슬펐다. 아 요즘 나 너무 철들었구나 하면서. 오늘도 아침에 아이들과 한바탕 전쟁을 치뤘다. 처음엔 분명 책임소재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 일방향의 신파가 되었다. 아이들은 저들끼리 이미 기분이 좋아졌다. 다만 나만 혹여 더 크게 화가 날까 괜히 조심스러워 저 방으로 숨어들어갔다. 거실에서 둘째의 말이 들린다. “엄마~ 어디가? 엄마?” 큰 아이가 둘째에게 답한다. “응. 뚜뚜. 엄마 방에. 금방 올거야.” 다행히 두 아이는 나를 개의치 않고 저들끼리 다시 즐거워졌다. 엄마의 어두운 기운이 보이지 않을만큼 서로의 옆자리에 꿰차고 앉아 격렬히 애증을 주고받는 아이들. 저들끼리 우다 웃다를 반복한다. 방에 들어간 나 역시, 밖에서 들려오는 아이들 소란에 금세 웃음이 났다.


아. 이 마약같은 녀석들.

끊임없이 나를 철들지 않게 하는 아이들.

철들지 않는 어른으로 살고 싶게 만드는 아이들.


조금만 더 천천히,

조금만 더 뜨겁게,

조금만 더 오래,

우리 함께할 수 있기를.


그러다가도 두 아이 싸움에 신경이 곤두서서 언성이 높아지는 나. 끝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

     

며칠 전 아침, 자고 일어나니 왼쪽 발톱에 매니큐어가 발라져있었다.(심지어 다 지워진 지저분한 발톱들 위에 아이들이 그려준 남색 엄지 매니큐어만 덩그러니.) 나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난 두 형제가 키득키득 ‘몰래 엄마발톱에 매니큐어 바르기’에 성공한 것. 그리곤 태연하게 내게 묻는다. “엄마 이거 뭐에요?”

     

여름에도 파카를 입고 나가고, 재활용 바구니 안에 들어가서도 한 없이 행복하고,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지 못하니 자신도 천국에 못 들어갈 것 같아 부자는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아이들. 엄마가 엄마 정치를 통해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아이들, 빨래를 엄마처럼 (말끔히) 개지 못해 성이 난 채로 빨래더미에 난입해 난장판을 만드는 아이들.

     

너희의 기쁨과 좌절감과, 천진난만함과, 진실함에 감사하며 늘 한 수 배워가는 나는.

오늘 하루 조금 더 사랑하고, 조금 덜 미안해하며 너희와 함께 하련다.

     

나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다른 이들의 노고와 같이, 나 역시 타인의 부족함을 채우고 돌보는 사람일 수 있길 바라는 간절함으로. 오래도록 철들지 않는 어른으로 우리 함께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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