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성실 Sep 10. 2018

[악착같이 육아일기] 어쩌면 나는 아이들이 아니라

20180910 나 자신에게 화가 나 있었던게 아닐까

이렇게 또 오늘의 후회가 시작된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엉망진창으로 헝크러진 마음.


두 시간 전 이 집을 나갈 때만해도 무섭게 치켜 떴던 두 눈인데, 지금은 염치 없게도 눈물이 고여 있다.


아이들을 공동육아에 맡기고 인터뷰에 지각하고, 정신없이 촬영을 마치고선 쌓여있는 부재 중 전화들에 답했다. 그리고 마감을 놓쳐버린 두어가지 일에 쫓겨 집으로 돌아오니 딱 두어 시간이 지나 있었다. 아침 내내 티격대는 두 아이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선, 분을 참지 못하고 냉기를 내뿜었던 나 아니었던가. 온갖 애교로 위기를 돌파하려는 아이들 앞에서도 쉽게 마음을 풀지 못한 채 차갑게 이 집을 나섰던게 불과 두시간 전인데.


휘몰아치는 이런 저런 일들 때문인지, 아이들의 소란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인지, 여튼지, 거짓말처럼 짜증과 분노가 사라졌다. 대신 마음을 채우는 건 후회와 미안함. 거실과 방 곳곳에 남겨 있는 아이들의 흔적, 흩어진 장난감, 떨어진 음식 부스러기들, 싸우다 만 장난감, 큰 아이가 숨어 들어가 눈물을 흐느꼈던 아이들의 최애(최고로 애정하는) 이불까지. 여기 저기서 아이들이 스친다. 아. 정녕 최선이었던가. 이렇게 또 오늘의 후회가 시작된다.


오늘 아침 집을 나서기 전, 둘째가 울먹이며 형에게 달려갔다.

"형아. 어떻게 해. 엄마가 화난 것 같아. 많이 화난 것 같아. 우누(자신을 지칭하는 말), 무셔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던 큰 아이가 곤란해하며 답했다.

"우누야. 엄마한테 가서 직접 이야기 해. 형아가 도와줄 수가 없어."


충분히 싸워 볼 기회

말문이 터진 둘째. 자기 주장도, 고집도, 욕심도, 말도 모든 것이 분명해진 둘째와의 기 싸움이 한창이다. 기싸움이란 표현이 우습지만, 그 단어 외에는 대체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공감하고 대안을 제시해주고 때때로 단호해질 여유가 요즘의 나에겐 부족하다. 그게 가장 큰 고민이라면 고민.


이런 상황을 예견이라도 한 듯이, 둘째가 막 돌 즈음 되었을 때 누군가 내게 조언했었지. 아이 둘을 기를 때 주의할 것 중 하나가, 편한 육아를 택하게 되는 일이라고. 비교적 순종적이고 틀이 분명한 큰 아이와, 자유롭고 고집 센 둘째가 있을 때, 큰 아이에게 양보를 권하는 일이야말로 '편한 육아'가 되는 법이라고. 큰 아이가 조금만 더 양보해 주면 모두가 편해지니까. 그러나 그것만큼 위험한 일이 없다고. 두 아이 모두에게 독이 되는 일일 수 있노라고. 씨름하는게 버겁고 고되더라도, 때를 놓치지 않고 둘째와 씨름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을거란 이야기.


덧붙여 그는 내게,  무조건 다툼을 진화하려고(또는 막으려고만) 하지 말고, 가끔은 충분히 싸울 기회를 허락해줘야 한다고 했다. 우격다짐을 하지 않는 이상, 저들끼리 지지고 볶으며 나름의 공생법을 찾아가도록 바라봐 줘야 한다고. 섣불리 나서 중재해버리는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노라고. 아이들에게도 저 스스로 자라갈 시간이 필요하다고. 손 쉽게 양보를 권하지도, 손 쉽게 판사가 되지도 말고, 어렵겠지만 적절한 거리에서 지켜보며 기다려 주는 인내심, 개입할 때와 관망할 때를 분별하는 지혜가 부모에게 가장 필요한 덕망일 수 있다고 말이다.


오늘의 나를 미리 보기라도 한 듯 던져졌던 예언.


두 아이를 기르는 일이 생각보다 고되다.

자는 시간이 일치하지 않아 절대적 수면량(또는 개인 시간)이 줄어든 것, 집안일이 훨씬 더 많아진 일을 차치하더라도 끊임없이 발생하는 크고 작은 갈등으로 인해 심신이 쇠약해지는 기분이다.

이 촬영 직후에도 아이들은 다퉜다. 엄마를 도와 갠 수건을 지키려는 큰 아이와 저도 그 수건을 만져 보려는 둘째의 실랑이

나의 두 세계가 충돌할 때

나의 두 세계가, 정확히는 나와 아이 둘 각자의 세 세계가 공존하기 위해 우리는 매일 수십번씩, 아니 수백번씩의 싸움을 반복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싸움의 기술. 어떻게 더 잘 싸울 것인지, 어떻게 덜 싸울 것인지. 대체로 두 아이간의 싸움을 중재해야 하는 나이기에, 가급적 이들의 싸움이 최소화되기만을 간절히 바라지만.(그래야만 내 스트레스가 줄어들기에) 그러면서도 마음 한켠에 주어진 책임을 간과할 수도 없어 딜레마다. 그건 바로 "더 잘 싸울 수 있도록" 아이들을 돕는 일. 무조건 싸움은 나쁜 것이라 말하거나, 누가 더 잘 양보하나 겨루게 한다거나, 엄마의 스트레스를 고려해 최대한 싸우지 말라고 가르치고 싶진 않기 때문일까. 수시로 심각한 내적 갈등에 휩싸인다. 며칠 전엔 (자주 그렇듯) 나도 모르게 큰 아이를 다그쳤다. 그냥 좀 참아주면 되잖아. 그냥 좀 양보하면 좋잖아. 그냥 네가 먼저 피할 수도 있잖아. 내심 그런 마음이 가득했는데, 관심법으로 그 마음을 꿰뚫어 본 아이가 내 눈을 보며 질문했다. "엄마. 그래도 싫을 때는 싫다고 말해야 하잖아."

맞지. 네 말이 맞지. 싫을 때는 싫다고 말해야지. 너도 충분히 양보하고 있지.

큰 아이를 향해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돌리니, 작은 아이가 서 있다. 작은 아이가 장황히 내게 설명한다. "엄마. 형아가 오지 말래. 우누가 안 부셨는데. 우누가 형아꺼 보고 있었는데. 형아가 나가래. 안 부술건데." 그리곤 심술 난 얼굴로 다 부셔버린다. 그런 작은 아이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돼 또 마음이 짠해진다. 가끔은 큰 아이에게 되묻는다. "근데. 정후야. 모두 다 형아 꺼라서, 그리고 늘 형아꺼가 더 멋져서(같은 장난감이어도 형아 손에 가면 더 멋지게 완성되기에) 엄마가 준후여도 부럽고 같이 하고 싶고 속상하고 그럴 것 같아."

"너도 옳고 너도 옳다." 누구 하나 더 나무라기 어려운 상황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누적되는 정신적 피로도. 두 아이 모두에게 전적으로 몰입되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세계가 부서질 것만 같아 고롭다.


우리 집에 비글이 산다

게다가 언제나 에너지도 호기심도 넘치는 아이들.

남편도 나도 늘 지쳐 있는데, 아이들은 시종일관 싱그럽다. 오늘 아침만 해도 두 아이가 번걸아가며 나를 깨웠다. "엄마. 일어나. 아침이야. 잠은 어제도 잤잖아." 작은 아이가 콧구멍을 찔러대며 하는 말. "엄마. 아직도 자? 빨리 일어나. 배고파." 큰 아이가 장난 삼아 똥침 하는 시늉을 하며 품으로 파고 든다.


왕성한 아이들의 에너지. 별명이 비글이었던 큰 아이에 이어, 작은 비글이 태어났다. 언젠가 지인이 우리 집에 왔던 날. 한 두시간 거실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급격히 피곤함을 호소한다. "아. 왜인진 모르겠는데, 너희 집 거실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 피곤하다." 그 지인은 이미 두 아이의 아빠였다. 유독 에너지 넘치는 두 아이 돌보며 지쳐 있는 내게 또 누군가가 말했다. "집 안에 비글이 둘이나 있으니." 누군가 말을 되받는다. "그러고 보니 둘째는 코카스파니엘을 닮은 것 같아." 내가 자조했다. "운명으로 받아들이려고요. 누굴 닮아 이리도 힘찬지." 그러자 또 다른 누군가가 의미 심장한 미소로 말을 이었다. "누구긴 누구야. 엄마가 슈나우저니까 그렇지." 비글, 코카스파니엘, 슈나우저는 속칭 3대 지랄견이라 불린다.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로 악마견이라 불리기도 하는 아이들. 기본적 성품은 온순하지만 워낙 에너지가 넘치는 탓에 잦은 바깥 활동으로 에너지를 충분히 발산하지 않으면 온갖 가구나 집기를 부수거나 물어 뜯는 것으로 유명하다.


얼마 전엔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 놀다 내가 유일하게 아끼는 귀걸이를 분실했다. 의미가 있어 소중한 물건이었다. 잃어버린 귀걸이를 한시간 가량 찾아 헤매다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아이들의 왕성한 에너지로 이미 지칠대로 지쳐있던 참이었다. "엄마, 미안해. 괜찮아?" 미안한 마음에 더 격하게 매달리는 둘째. 빨리 귀걸이를 찾고 나가려는데, 고나무의 매미처럼 매달린 둘째로 인해 바지 하나 입기 편치 않았다. 눈치 빠른 큰 아이가 서둘러 거실을 정리하다가 안방으로 들어오더니 동생을 데리고 나갔다. "쉿. 그만 나가자." 나 몰래 수신호를 보낸다. 사태가 진정된 후 큰 아이에게 내게 슬쩍 귀뜸했다. "엄마가 오늘 이상했어. 평소처럼 한숨 쉬고 "하지말아" 이렇게만 한 게 아니고. 막 소리질러서 무서웠어." 어떤 날엔 큰 아이가 둘째를 달래 안고 내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우누야. 엄마가 화나서 많이 무서웠어? 그러니깐 앞으로 그러지 마. 엄마 울고 있으니까 같이 가서 달래주자." 순간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 나 자신이 싫어 구석에 숨어 울고 있던 날이었다.


그렇게 나의 불안과 두려움을 후회한다

부모의 역할이 내 역량 밖의 과업이란 생각이 들 때면, 순간의 내 감정을 관리하지 못하고 아이들에게 과잉대응한 것 같아 후회되는 날이면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절로 나온다.

어쩌자고 아이를 둘이나 낳았던가.


두 아이의 실랑이를 말리는데서 시작한 일이 결국엔 나와 아이의 갈등이 되고 말 때, 그런 나 자신을 수용해주기 어렵고, 어디서부터 잘못된건지 오답노트(육아일기) 쓰곤 해왔다. 한 발 떨어져 상황을 재구성하다보면 감정도 누그러지고 무엇보다 인과분석이 가능해진다. 일종의 다짐과 대안까지. 그러나 그렇게라도 복기할 짬을 얻지 못하는 요즘 같은 날들엔, 많은 순간 날이 서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조금 더 넉넉한 대양이고 싶은데.

아이들이 양팔을 휘둘러도 가 닿지 않는 더 큰 엄마이고 싶은데.

때때론 아이들의 응석을 응석으로 받아 줄 연륜 깊은 어른이고 싶은데.


한 순간의 실수가 곧 영원한 실수가 될 것처럼 

나 자신도 아이도 쉬이 용납하지 못하는

순간 순간의 내 안에,

두 아이보다도 더 작은

어린 아이가 살고 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서른 세 살의 내가 아니라.


아니 어쩌면 난 여적 자라지 못한 어른이다.


아이들이 자라는 속도에 발맞추고자 힘겹게 자라고 있는 어른아이.


어쩌면 나는 아이들이 아니라, 그런 나 자신에게 화가 나 있는게 아닐까.


내 삶조차 책임지기 버거운 나에게 주어진 두 아이,

이들에 대한 책임이 버겁게 다가올 때,

속절없이 화를 내고 그런 내 모습을 또 다시 후회하는 나.


그 마음 바탕엔,

이 반짝거리는 아이들의 인생이,

지 같게만 느껴지는(물론 그렇지는 않지만)

이 아이들의 삶이,

혹여 부족한 나의 어떠함으로

방해 받거나 훼손받지는 않을까 하는

조용한 두려움이 숨어 있다.


그 두려움을 밀어내기 위해,

그 불안을 감추기 위해,

때론 화를 내고 때론 운다.


그렇게

나의 불안과 두려움을 후회한다.   

어쩌면 나는, 아이들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화가 나 있는게 아닐까.


여기, 오늘, 우리의 행복

지난달이었던가. 무더웠던 저녁, 아이들과 함께 한강변에 갔었다. 놀이터에서 한참 놀다가, 아이스크림 하나씩 사들고 선착장에 앉아 한강의 밤풍경을 보고 있었다.


"오늘 하루 언제 가장 행복했어?"

서로를 향해 던져진 질문, 주저 없이 큰 아이가 답했다.

"지금 여기"


친구들과 바깥 나들이를 다녀왔던 날이었기에, 그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어 던진 질문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아이의 대답에 남편과 나의 두 눈동자가 마주쳤다.

아이는 여전히 시크하게 반짝이는 강물만 응시한다.


주차장으로 가려는데. 문득 큰 아이도 안아줘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제 제법 많이 무거워져서 예고없이 달려올때면 나를 휘청거리게 만드는 여섯 살 큰 아이. 굳이 잘 걸어가고 있는 아이를 불러 안아 올렸다. 좋은 마음 감추지 못 하는 아이. 아까 그 대답이 대견했던 내가 굳이 한 번 더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정후야. 오늘 하루 언제가 가장 행복했다고?"

그러자 아이가 한 단어를 덧붙여 다시 답했다.

 "지금, 여기, 우리라니까."


두어걸음 뒤 아빠 품에 안겨있던 둘째가 추임새를 넣었다.

"햄복해!"

정확한 발음도 구사하지 못 하는 아이의 올망한 입에서 터져 나온 세글자.


행.

복.

해.


하마터면 놓치고 말았을 아이의 작은 탄성에 우리 모두의 마음이 녹아내렸다. 다음에도 또 같이 오자 여기. 그리고 아이스크림도 또 먹자. 밤에 놀이터에서 또 놀자.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이들의 소란이 이어졌다.


엊그제 밤엔, 아이가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책을 뽑아 들었다. 모두 불 끄고 자려는데, 이 책 딱 한 권만 읽고 자자 성화다. 결국 불을 다시 켜고, 정말 마지막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생에선 가난했던 거지 나사로. 부자 집 앞에서 구걸할 힘도 없이 누워있던 나사로가 천국에 가는 이야기. 반면 지옥으로 가게 된 나사로가 신에게 간구한다. 제발 나사로를 제 형제와 가족들에게 보내달라고. 죽은 자가 살아온 걸 보면 그들이 깨닫지 않겠느냐고.

신이 답한다.

이미 그들에겐 선지자들로 이어진 말씀이 있노라고. 책을 덮으며 시작된 아이의 고민.


"나는 천국으로 가고 싶다."


아빠가 물었다.

"정후야. 하나님이 지옥을 만드셨을까?"

나도 이해하기 어려운 심오한 질문을 여섯살 아이에게 던지다니! 정후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내가 답했다.

 "후야. 엄마도 잘은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안계신 곳이 그냥 지옥인 것 아닐까? 빛이 없는 곳이 어둠인 것처럼."

아빠가 이어 말한다. "지옥은 미움과 욕심과 질투가 가득한 곳이래." 아이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헉. 그거 내가 매일 하는건데."

일이초의 정적 후에 아이가 다시 말을 잇는다.

"엄마 무서워. 기도해줘."


잠들기 전 우리의 기도가 시작되었다.

"하나님. 우리 마음을 지켜주세요. 엄마, 아빠, 정후, 준후 마음에 자주 미움이 생겨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힘을 주시고 우리를 매 순간 감동시켜주세요. 하나님의 마음으로 물들여주세요. 마음을 지켜주세요. 예수님을 따르고 닮도록 도와주세요."


그 기도는 나를 위한 기도였다.

겸손하고 솔직한 아이가

내 대신 입밖으로 내 마음을 꺼내준 것 뿐.

 

다퉈야할 때와 사랑해야 할 때를 분별하게 해 주시기를. 두려워하고 미워하지 않도록, 넉넉히 견뎌낼 힘과 용기를 주시기를. 나의 부족함에 아이들을 가두지 않고, 이들의 삶을 인도하시는 신의 섭리와 돌보심을 신뢰하게 해주시기를. 덜 후회하고 후회없이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오늘 우리에게 작은 천국의 빛을 비춰주시기를.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큰 아이의 말이 귓가에 쟁쟁하다.

"엄마. 그거 알아? 아빠는 안돼쟁이고, 엄마는 나중에쟁이 같아. 요즘 엄마가 자꾸만 '나중에'라고 말해서."


그래서 결심한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아니 오늘 딱 하루만
절대로 '나중에쟁이'가 되지 말자.


돌아 온 아이들이 실랑이를, 다툼을 시작한다면,

조금만 더 기다려줘야지.

아이들을 믿어줘야지.

빛 가운데서 충분히, 건강히,

제가 할 수 있는 몫만큼 최선을 다해 싸워볼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지.

조금만 천천히 개입해야지.

제 스스로 실패하고 가늠해 볼 여유를 줘야지.


끝내지 못한 일들에 쫓겨

오늘, 여기, 우리의 행복을 놓치지 말아야지.

세 번 더 심호흡하고 말해야지.

아이가 화해와 용서를 요청할 때 빠르게 안아줘야지.


더 큰 용서를 구할 일이 없기를.

더 큰 후회를 반복하는 일이 없기를.

두서 없는 다짐과 기도로 마음을 다잡아본다.


아이들은 아무 일 없는듯 잘 놀고 있다는데, 괜히 나만 후회와 자책 속에 허우적대고 있다.

이런 순간이 얼마나 더 많이 반복돼야 어른이 되는걸까.


이러다가도 또 금세

아이고 예쁜 내 새끼

자식은 왜 이리 예쁜걸까


하며 탄사를 감추지 못하는 내일이 오겠지. 아니, 어쩌면 내일이 채 오기도 전에. 중독같은 탄사가 반복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일전에 써두었던 일기만 보아도 그렇다. 그 일기를 다시 꺼내 읽으며 다시 엄마 미소 배시시, 아이들 올 시간이 내심 기다려지는 나 자신만 보아도. 가끔은 이런 내가 정상은 아닌 것 같다. 누군간 자식 키우는 일도 일종의 중독이라고 말했다. 약도 없는 병이라고.


병에서 헤어나오는 길은, 서로 공존할 길을, 서로에게 가장 적당한 거리를 찾아가는 것, 그 수밖에.

화장실까지 굳이 따라와 쭈그리고 앉아 사과를 먹는 아이. "엄마 좋아."를 연발하며 배시시 웃는다. 이러니 중독될 수 밖에.



20161214 [아이고 예쁜 내 새끼]


별것 아닌 일에도 화가 올라오고 짜증이 스멀스멀 새나오는 걸 보니

정말이지

피곤엔 장사가 없나보다.


그러다가도


두 아이 마주 앉아 서로 얼굴 감싸쥐며 까르르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잠시나마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린다.


인형 아니냔 질문만 여러차례, 준후는 소리소문 없이 안겨있기 대장이라. 웬만해 힘들게 없는데.


이번 혹독한 감기로 밤낮 고생이 많았다. 분당 호흡수가 70회를 넘고 중간중간 숨을 잘 못 쉬기까지해 야간응급실까지 다녀온 후로 한숨 돌렸다했는데 정후까지 천식성 기관지염 진단을 받고 밤새 열과 기침으로 끙끙 앓는다. 가계 경제도 정세도 나빠져만 가는데, 그 놈의 바이러스만 왜 매 해 강력하고 새로워만 가는지. 응급실 가니 준후보다 더 작은 아이들도 많았다. 한겨울까지 미세먼지를 걱정하게되는 현실이 낯설기만 한 2016년. 내 아이가 부모가 될(지도 모르는) 2046년의 어떤 날은 까마득하고 또 아득하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환경문제, 일자리문제가 이렇게까지 사실적으로 와닿았었나 자문해본다. 걱정이야 되지만 뭐 어떻게든 나하나라도 살아남아보자, 살아남을수야 있겠지 싶은 맹목적인 이기심이 인식 기저에 깔려있짐 않았나 반성하게된다. 분명. 진심이었던 것 같은데 내 아이 살아갈 시대문제라 생각하니 그 깊이와 정도가 훨씬 더 심화되고, 그런 나를 보며 진심의 깊이도 날로 진보할 수 있단 사실을 깨닫는 요즘.


고된 노동과 피로에 실신한 J가 잠 못 드는 정후를 채근하며 먼저 잠든 밤.


한참을 더 놀다 잠드는 정후가 나를 제 품쪽으로 슬쩍 잡아 끌면서.

"나는 엄마가 좋아. 많이. 음. 아빠도 나를 좋아할까?"라고 속삭인다.


정후 생각은 어떻냐니 좋아할것 같다며 내일 직접 물어본다고.


이번엔 후에게 내가 속삭인다.

"후야. 그거 알아? 정후는 엄마의 뮤즈야."

"뮤즈가 뭔데?"

"음. 그건.... 영감을 주는 사람이란 뜻인데(이어 말하려는데…)".

"으~~~~~나는 영감은 싫은데! "

"아니. 그 영감이 아니고."

"엄마. 나는 그럼 그거(뮤즈) 안할래. ♪♭영감~ 왜불러~ 앞 뜰에 매어놓은~  그 영감 말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 여튼 정후가 엄마 최고의 사랑이란 뜻이야!"


몸이 피곤하고 마음이 복잡해질 때면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날이 선다. 별 거 아닌 일에 트집을 잡고 싶어지고 평소보다 더 엄격하게 기준을 내민다. 그래서 요즘엔 아이에게 못마땅한(?)(잔소리를 늘어놓고 싶어지는) 부분이 보이면, 먼저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 지금 피곤한가?" 그 질문을 시작하자 반성문 쓸 일이 조금은 줄었다. (여전히 저지르고 후회하하기도 하지만)


꼭 반성은 아이 중 최소 하나가 잠들기 시작해야 시작되는데. 아빠 없는 밤, 양팔에 누워 숨소리 방아를 찧어가는 두 아들을 번갈아보며 엄마되길 참 잘했단 생각과 함께 반성하고 자라갈 기회를 계속적으로 제공해주는 아이들에게 무척이나 고마워진다. (그 와중에  달토끼 방아찧듯 교차되는 아이 둘의 숨소리를 녹음해 연구실에 있는 남편에게 보내는 기록변태 1인 ㅎㅎ)


한창 그런 생각에 젖어있는데.

후가 내 쪽으로 더 바짝 붙어 발을 내 몸통에 휘감는다. 이미 팔베개를 하고 허리를 휘감은 작은 녀석이 내 왼켠에. 나는 완전히 포위된다.

정후는 내 동역자다. 준후 역시 정후 얼굴에 가장 잘 반응하고 정후 재롱에 가장 크고 오래 자지러지게 웃어댄다. 배고파 밥을 먹는데 준후가 칭얼댄다. 이 때가 아니면 기회가 없단 생각에 밥 먹는데 집중하는 나와 준후와 밥상 사이를 오가며 온갖 노력을 다하는 정후. 내가 저에게 하듯이 준후 옆에 같이 누워 책을 들고 읽어주기까지. 그 와중에도 혹여나 책이 떨어져 준후가 맞을까 걱정하면서도 둘의 조합이 너무나 아름다워 한참을 보고 있다. 준후에게 엄마를 뺏겨 너무 화가 날 때면 "얄미운 내 동생" 책을 꺼내와 읽어달라며 으~~~~~~얄미워~~~이 코알라 조준후~~~~하고 마는 큰 아이 모습에 문득씩 코가 시큰하다.


터울 진 막내딸로 자란 나는. 늘 오빠가 부러웠다. 나는 다섯살 터울에도 파란색 오빠 내복을 물려입고 단식을 해서도 따내지 못한 보이스카웃(걸스카웃)도 오빠는 학년대표로 상을 받으며 졸업했다. 나는 나를 적극적으로 지도해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학원광고물을 받아다 엄마에게 보내줄것을 늘상 어필했지만 내가 보기에 오빠는 늘 부모님이 먼저 뭔가를 많이 지원해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새것을 갖고 먼저 받고 싶었었는데...요즘은  좀체 큰 아이 정후가 마음에 짠하다. 당연히 그럴 나이가 돼 혼자 노는 것인데도, 제 몫의 노고를 힘차게 견뎌가는 아이에게 감사함을 또 왜인지 모를 미안함을 느낀다. 얼마 전 맏이인 A가 "나는 누나라 늘 새걸 쓰는 편이었지만 그런 물건과 달리 왜인지 엄마 마음이 동생에게 더 가있는 것 같어서 항상 서운했다."고 했다. 그럴 수 있겠구나 싶었다. 낳고보니 더 아픈 손가락 없는 것도 같지만 키우다보면 아무래도 더 약한 자식, 어린 자식에 대해 좀 더 노력과 관심을 할애하게 되겠지 싶으면서. 태어난 순서보다도 누가 더 약하고 마음이 쓰이느냐의 문제일 것 같기도 하지만. 여튼 현재는 늘 정후가 내 마음 언저리에 서 있다. 좀 지나 형제 육탄전이 벌어지기라도 하면 그 땐 또 힘이 약한 녀석에게 마음이 가려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정후가 갑자기 노래를 부른다.

"저 깊고 깊고 산 속, 꼬막살이에도 탄일 종이 울"

곧장 이어지는 코고는 소리.


잠꼬대다.


아이고 예쁜 내 새끼.

자식은 왜 이리 예쁜건가.

이렇게 예뻐도 되는건가.


"모든 아이에게는 집과 가족이 필요하다"는 다큐멘터리 감독(재외로 입양돼 성장. 세계 흩어진 한국 입양아들을 다룬 다큐를 제작중이었던걸로 기억)의 인터뷰를 보고 캡처해두었던 기억이 난다.


모든 사람에겐 조건없는 사랑이 필요하다.

따뜻한 집과 가족이 필요하다.


내 품의 자식들 예쁜 짓을 위해

남의 자식 아픈 건 잘 참고 보는

사람들의 작태를 볼 때면


진심으로 사람이 무서워진다. 본래 사람이 가장 무서운 법이다.


정후도 알고 느끼는 사실에 눈 감는 사회. 그간 한쪽 눈만 뜨고 살아왔던 사실에 부채감을 갖고 두 눈을 번쩍 뜰 수 있기를!


다시 후후 형제 얘기로 돌아와서

얼른 열살이 되고 싶다는 정후. 왜냐하니 얼른 커서 엄마처럼 준후를 안아주고 업어도주고 먹여도 주고 싶다고. 준후는 이런 형아의 사랑과 헌신을 알련지 모르겠다. 같은 세계와 가치를 공유하는 동역자로 잘 자라가길! 준후를 먹이고 싶다는 정후, 요리에 관심 많은 정후를 위해 열살부턴 칼질과 불질을 허용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엊그제는 빨래하는 법을 알려달라며 세탁기 옆에 붙어 세제 사용법과 작동법을 자세히 묻는다. 이런 정후 보며 시어머니를 떠올리는 나. 더 많이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면서도 마음 한켠으론. 나 역시 정후를 한발짝씩 내주어야지 마음먹는. 설레발 엄마.


두 녀석 어서 나아서

다시 파티걸로 돌아가고싶다. 정후깼다 오늘은 여기서 끝

매거진의 이전글 나 너의 너른 대양이기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