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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성실 Oct 05. 2017

[생활력:생활의 모욕을 견디는 힘]

20170326

[생활력]이란 '생활의 모욕을 견디는 힘'이다.  
 
콜센터 관련 업무를 맡았다던 후배가 되뇌였다. "앞으로 전. 생활의 모욕을 모른 채 관념으로만 사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기로 했어요."
오래도록 곱씹었었다, 그 말을.  
 
며칠 전이었다.
겨우 겨우 아이 둘을 재우고 자정이 넘어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닭다리 두어개와 아이스크림을 사 왔고 폭풍 흡입했다. 남편과 나 모두 작은 방 구석에 구겨앉아, 한손씩 비닐장갑을 꼈다. 각자 책을 읽으며(그 날 따라!) 닭다리를 뜯기 시작했다. 말소리에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에 누구 하나라도 깰까 숨을 죽였다. 먹는 도중에 아이 하나라도 깨면 이 사치마저 끝장이다. 역시나 젖먹이 둘째가 자꾸 깬다. 안간힘을 써 보지만 결국 실패.  서너번 물어뜯긴 닭다리 잔재를 남겨놓고 애 재우다 나도 같이 잠들었다. (그 와중에도 초코우유와 치킨을 산 내 우매함에 대해, 콜라를 마시고 싶단 간절함을 묵상했다니ㅎㅎ) 그게 벌써 며칠 전의 일이다. 오늘 대청소를 하다 그 날 남긴 닭다리 한 조각을 냉장고에서 발견했다. 곰팡이가 피고 있었다. 구토와 설사, 열, 발진, 임파선 비대, 입원, 퇴원, 다시 구토와 설사로 이어진 한달간의 아들 병간호, 그 후유증이었다. 그 날 밤 그 장면.  
 
그 날 나는 '나는 작은 회사에 다닌다'(출판사:남해의 봄날)를 읽고 있었다.
쫓기듯 몰래 치킨을 뜯으며 그 책을 읽기 시작하는데, 불현듯 엄마의 노동, 엄마의 생활력이란 단어에 꽂히고 말았다. 생각이 생각에 끊임없이 이어졌다.  
 
소녀같은 우리 엄마가. 때론 푼수같기도 한 내 엄마가. 적성에 참 안 맞는 일을 견디며 우리를 키워왔구나 싶었다.  
 
살림에 큰 재미도 타고난 재능도 딱히 없어보이는 엄마가(엄마 디스 미안 ㅋㅋㅋ; 내가 엄마를 닮았나봐 으하하하) 창창했던 젊은 날의 꿈을 뒤로하고 십오년을 가까이 오로지 아이, 살림, 내조에 전념하고. 그리고나서도 또 다시 적성에 안맞는 일들을 연달아 해가며 우리를 키웠던 세월. 갑자기 우리의 역사가 스쳐지나갔다.  
 
전업맘으로 살아 온 지난 사년여간 나는 수도 없이 무능감에 부딪히고 몸부림쳤다. 재능, 적성에 이어 심지어 의미조차 크게 못 찾겠는 살림을 맡아 해야하는 일이 곤욕이었다. 그리고 자주, 나에 대해 또 나의 미래에 대해 고민했다. 물론 다시 없이 아이가 예뻤다. 최고의 행복과 황홀경이었다 자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무능감과 황홀감, 이 믿기어려운 두 감정이 공존했다. 엄마의 자리에선 가능했다.  
 
그리고 일하는 엄마들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프리랜서든 회사원이든 전문직이든 무관하게, 대한민국에서 엄마로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은 아마도.... 무능감이 아닐까. 일도 육아도 뭣하나 제대로 못 해내고 있는 기분. 그래도 일 하나는 제법 했던 나인데, 그 마저도 위태위태 눈칫밥을 먹게만 되는 기분. 아이에게도 화사에도 왜인지 미안해지는 미안해야 할 것 같은 그런 감정이.. 엄마들을 짓누른다.  
 
부끄럽지만
그간 어쩌면 단 한 번도
엄마가 느껴왔을 무능감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의외였다. 내 자신에게 놀랐다. 실망했고 더 늦지 않아 다행이라 애써 자위했다.  
 
내 엄마의 생활력,
저 시대에도 이 시대에도 교묘하게 별반 다르지 않은 엄마들의 생활력에 대해 곱씹는다.  
 
[생활력]이란, 아무리 생각해도 '생활의 모욕을 견디는 힘'이다. 적어도 내가 맛 본 세계에선 말이다.  
 
십대 이십대의 나는, 꿈을 위해 밥을 굶는게 용기라고 여겼고, 자본의 힘에 휘둘리지 않고자 애써왔다. 그 저변에 노동의 가치를 왜곡하는 천박한 우월감도 어느정도 바탕해 있었음을 반성한다.  
 
꿈을 위해 자기 실현을 위해 이상을 위해 배고파지는것보다
어쩌면.
누군가를 먹이기 위해
생활의 모욕을 견디며 꿋꿋이 일터로 향하는, 향해야만하는 발걸음이 훨씬 더 멋지고 위대한 것 아닐까?
이제껏 대단한 용기라고 단언했던 그것이
가난하게라도 먹고는 살 수 있는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사치일 수 있단데 다시 한 번 뜨끔한다.
 
그 날 따라 그 사실이 너무도 선명히 다가왔다.    
 
자식들 몰래 치킨을 숨어 마시면서(그야말로 치킨 몇 점을 벌컥 벌컥 마시면서!) 작은 일터를 꿋꿋이 지키는 이들의 빛나는 노동을 보며 파노라마처럼 스친 생각들.  
 
자식 둘 낳고서야 이제야 비로소...
자식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 참아내야만 하는 생활의 모욕이 얼마나 쓴지, 얼마나 고된지, 다시금 곱씹는 나.
절대로 아름다워서는 안 되는 그 인내가,
아름다워 보이는 오늘 우리의 현실이
서글프다.  
 
생활의 모욕을 견뎌야만 기본생활이 가능한 나라.
그 논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나라.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답게 살 수 없단 공포가 좌절이 매일의 오늘을 담보잡는 나라.  
 
더 이상 관찰자로 안주하지 않겠다 용기를 낸다.  
 
생활의 모욕을 견디지 않아도 최소한의 인간성을 지킬 수 있는 나라가 과연 가능할까.  이 세계를 벗어난 어딘가에는 있다고하니 그제야 숨통이 트인다. 그 언저리라도 갈 수나 있겠나 싶어 막막하다가도 혁명과도 같은 저력을 보여주는 상식적인 시민들을 바라보며 희망이 자란다.  
 
나야말로
누군가의 밥값을 위한 노동을 먹고
여기까지 왔다.  
 
내 아이와 그의 친구들만큼은
제발
그런 부모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생활의 모욕을 견디지 않아도 인간다울 수 있는 사회.
무능감을 견디지 않아도 부모가 될 수 있는 사회.
그런 미래를 맞이하고 싶다.  
 
가자.
생각만큼 빠르게.
빗장을 열고 문을 부수고
다시 사회 안으로.
사람들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겠다 다짐했다.  
 
.
.
 
이 글의 키워드들을 부리나케 메모장에 적어뒀다. 그리고 눈 깜짝하니 또 며칠이 훌쩍 지났다.
아침에 눈 뜨니 띵동.
친구로부터 온 기사 링크.  
 
비슷한 생각을 가진 엄마가 소리친다.
만나자고.
우리 모이자고.
같이 하자고.  
 
혼자가 아니니 손을 잡자고.
여기 우리.
투명인간이 아닌 우리가
버젓이 눈 뜨고 여기 있다고
함께 외치자고 했다.  
 
소오름.
며칠 전 남편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여보. 나 결심했어.
이제 떠날거야(안전한 내 땅에만 머무르지 않을거야)
그리고 가야겠어. 사람들에게로.
생각을 현실로 만들 수 있게."
(외부자, 관찰자가 아닌 주체로)"
 
기사를 통해서였지만
왜인지 우리 만나자는 그 말에 전율을 느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을 만날지
어떤 모임이 펼쳐질지 알지 못한다.
이 글을 지우고 싶어질 순간이 올 지도 모르겠다. 별 일 아니었는데 호들갑이었다 부끄러워질지도.  
 
다만.
중요한 건.  
 
다양함을 만나고 대화하고 조율하고 때론 부딪히고 다시 대화하고.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바탕이 달라도
소통이 가능한,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일반 다수 시민의 대열에
보다 적극적으로 서겠다는 결심.  
 
문제의식을 변화로 바꾸는.
예민함을 진보의 계기로 삼는.
오늘보다 나은 세상을 물려주는
엄마가 되리라는 작심.  
 
그것이야말로
엄마 아빠에게 빚져온 생활의 모욕감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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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실 분 오세요, 편안히 오세요,
우리 꼭 만나요-

[정치하는 엄마들(준비위)]

https://www.facebook.com/groups/political.ma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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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03 26 이 글을 쓰고 반 해도 더 지났다.

이 글을 sns에 공유하고도 결국 혼자 갔던 첫모임. 운명처럼 정치하는엄마가 되었다. 삶의 반경이, 세상을 바라보던 관점이, 행동양식이 여러모로 달라진 요즘.


변하지 않은 한가지.

여전히 당신을 초대한다.

정치하는 엄마로.

정치하는 아빠로.

정치하는 할머니로. 이모로 삼촌으로. ^^


카페도 있어요. 오세요 오세요.

http://cafe.naver.com/politicalmamas

http://political-mamas.org (공식홈페이지)


[본 글은 회원 개인의 글이며 단체의 공식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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