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성실 Oct 05. 2017

아픈 손가락

어느 날부턴가 나는

아픈손가락이 되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여러 자식 중에 꼭 속 썩이는 자식이 있기 마련이다. 보통의 엄마들은 이 아픈 손가락을 부둥켜 안고 운명처럼 지고 간다. 때로 악다구니를 쳐도 제 업보마냥 결국엔 껴안는다. 마지막까지 엄마가 되어준다. 아픈 손가락이 하나 이상인 경우도 많다. 아픈 손가락이 가득해 바람 잘 날 없는 집안도 적지 않다. 이러한 현상은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모든 자식이 번듯하게 자리 잡아 다른 부모들의 부러움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가정들도 속사정을 들춰보면 저마다의 고충과 아픔이 있다. 모르긴 몰라도 그 와중에도 좀 더 아픈 손가락이 있기 마련일게다. 여튼 열 손가락 깨물어 안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냔 속담이 무색하게, 결국엔 아픈 손가락이 있기 마련인 것 같다. 그래서 아픈 손가락을 더 애정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되겠지만, 어찌 되었든 좀 더 가냘프고 연약해보이는 손가락이 아프고 신경 쓰이는게 인지상정일테니. 그간엔, 속 썩이고 사고 많은 아픈 손가락을 감싸는 부모들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마음 한 켠에, 엄마가 저렇게 싸고 돌아서 되려 아이가 더 잘못 된게 아닌가 넘겨짚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두 명의 아이를 낳고, 막상 나 자신이 아픈 손가락이 되고 보니....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어찌되었든 서울에서 사년제 대학을 나오고 제 앞가림 정도는 톡톡히 해나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딸이,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고, 빠듯하고 근근한 형편을 꾸려가고, 제 몸뚱아리로 입덧을 하고 배가 부르고 산고를 겪고 젖먹이고 아이를 안고 업어 기르고. 직장마저 그만두고. 아이 하나도 기르기 힘든 세상에 용감하게도 아이를 둘씩이나 낳고, 자기 명함 하나 갖지 못하고.. 일도 가정도 제법 잘 꾸려가리라 기대했던 딸의 현실은, 늘상 늘어진 티셔츠에 헝크러진 머리, 사내아이 둘에게 채여 밥 한그릇 맘편히 먹지 못하고 대상포진이며 온갖 새로운 이름의 병치레로 치환된다. 상황이 이러니, 그 딸이 무얼한대도 마음에 걸리는게 부모의 마음일 것이다. 경제적인 형편, 사회적 지위 모든것을 아우르는 감정이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부모님의 아픈 손가락이 된 주요 원인은 내가 "여자이고 엄마란" 사실에 있다. 친정 어머니와 아버지 역시 내 딸이 살아갈 세대는 본인과 본인의 아내의 세대와는 다르리라 믿어오셨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알파걸로 불리며 자라온 세대가, 여자란 이유로 엄마란 이유로 더 많은 것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 상상이나 해봤을까.


아픈 손가락이 되기 전에는 내게 자격지심 같은게 생기리라고도 짐작하지 못했다.

어느 날 친정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아빠가 내게 물어오셨다. 네가 그렇게 반응하는게 자격지심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보라고. 아니라고 돌아서면서도 마음 한 켠이 찝찝하다. 내게는 그 질문에 대항할 수많은 논리가 있었지만, 전적으로 부정하기엔 왜인지 모르게 뭔가가 불편했다. 그래, 어쩌면 내 안에 일말의 자격지심 같은게 똬리를 틀고 있을지도 모른다 싶어졋다. 아픈 손가락이 되고 상대적 약자가 된다는 건 어쩌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일종의 자격지심 같은 걸 내포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사회의 일원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제 아무리 스스로 당당하다손 쳐도, 전업주부를, 엄마를 규정하는 여러 시선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해지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규범화된 타인의 시선, 이미 규격화된 사회의 가치관을 뛰어넘어 자존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지난 삶의 선택들에 후회가 없다손 쳐도, 딸의 삶 만큼은 나와 다르리라 믿고 자신의 삶을 댓가로 지불해 온 엄마를 실망시켰다는 부채감이 내 심연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선 불쑥씩 자격지심 비슷한 감정으로 튀어나온다. 엄마를 곧 밥처럼 인식하는 사회 구조에 반기를 들면서도 정작 나는 엄마의 밥을 기다린다. 엄마의 지난 삶을 만족스럽게 보상해 주지 못한 딸이지만 여전히 엄마가 차려 주는 밥을 기다리고 그 밥으로 힘을 얻을 때, 그리고선 다시 엄마는 곧 밥이 아니라고 엄마에게도 엄마의 삶이 있다고 외치러 나갈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순된 감정에 뒤엉키고 마는 나를 발견한다. 그 모든게 자격지심 비슷한 감정으로 작용할 때, 아픈 손가락이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쏟는다. 엄마가 되고 한 해 두 해 시간이 지나고, 아이들이 인간답게 먹고 자고 스스로 화장실에 가고, 나에게도 오롯한 개인의 시간이 조금씩 생기고, 무엇보다 내 안의 여러 상처들이 차근히 해소되면서, 이전보다 주저앉아 울 일은 훨씬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엄마가 된 딸은 친정 부모에게 아픈 손가락이다. 그 사실이 너무 속상하다.


우리 사회에서 엄마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제 부모에게 아픈 손가락이 된다.

임신과 출산, 육아의 과정에서 여자는 몸으로 오롯이 많은 것들을 짊어져야만 한다. 그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보다도 더 많은 포기와 헌신을 강요당한다. 맘충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혀 끊임없이 자기를 검열하고, 육아와 일이라는 극단적인 양갈래 길에서 자의로 타의로 그간의 나를 지탱해 온 꿈과 일을 포기한다. 억척스레 붙들려 해도 이쪽에나 저쪽에나 미안해야 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일을 해도 짠하고, 일을 그만둬도 짠한... 그런 존재. 엄마가 되어버린 나의 딸..

너만큼은 그렇게 살지 않기를 바랐지만, 결국엔 너도 여자란 운명을 거스를 수 없구나 싶어 체념하게도 되는,

그나마 그 운명을 거슬러 볼 수 있도록 평생을 엄마로 살아왔던 나의 엄마가 또 다시 내 아이의 엄마 역할을 자처하게 되는 현실.


우리의 딸들은 여동생들은,

더 이상 여자란 이유로 엄마가 되었단 이유로

누군가의 아픈손가락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아픈 손가락이 되고 보니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어느 사회학자의 말처럼, "문제로 정의된 사람이 그 문제를 다시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혁명은 시작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악착같이 육아일기] 무엇 하나 바꾸지 못한다해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