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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태진 Sep 17. 2021

배가 조금 고픈 돼지는 행복할 수 있을까?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제가 아직 누가 봐도 싱싱한 젊음을 유지하고 있던 시절에 에리히 프롬이 쓴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을 친구로부터 소개받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 그 누구라도 이 책의 제목이 적힌 표지만 봐도 소유보다는 존재가 훨씬 멋있어 보이고 고상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좀 촌스럽고 낡은 말이지만 저는 이 책의 제목을 보고 대학교 초년생일 때 누군가로부터 우연히 들었던 배 부른 돼지가 될 것인가 아니면 배 고픈 소크라테스가 될 것인가라는, 어찌 보면 당시의 실존적 고민을 담은 말이 기억났습니다. 하나마나한 질문이겠지만 그 당시에 누군가 그런 질문을 한다면 "나는 배 고픈 소크라테스보다 배 부른 돼지가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답을 당시에 했다가는 요샛말로 졸지에 왕따를 당할 것이 두려워서일 수도 있지만 20대의 젊은 나이에 그것도 민중이나 독재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말들이 주는 중압감 때문에 그런 마음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스스로 받아들이기는 무척이나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어느 누구도 물질적인 기반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건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건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갓난아이가 생존에 필요한 먹이를 위해 엄마 젖부터 찾는 생존본능이 증명하는 사실로 이런 얘기를 굳이 하는 제가 바보스러울 지경입니다. 우리는 흔히 평범한 우리와는 차원이 무척 달라 보여서 성현이나 성자로 추대받는 사람들이 우리와는 달리 물질적인 한계를 벗어난 것 같은 막연한 편견을 가지기도 하지만 만약 그 사람들이 아침에 침상에서 일어나서 양치질과 세수를 한 뒤 아침밥을 먹을 것이며 봉사활동이나 종교활동을 한 뒤 에는 다시 고파진 배를 채우가 위해서 점심밥을 먹을 것이 후식으로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신 뒤 머리를 식히려고 산책을 나갈 때 추운 날씨 때문에 두꺼운 외투를 입을 뿐만 아니라 저녁밥을 먹고 나서 후식으로 먹기 위해 자기가 좋아하는 과일을 사기 위해 지갑을 챙기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면 그들도 평범한 우리들과 그리 다를 바 없이 물질적 조건으로부터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텐데 그렇다고 그들의 선한 실천과 모습이 훼손된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잘 알면서도 자기의 편견을 고집하는 이상한 사람일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중에서야 새삼스레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돼지라는 그리 유쾌하지 못한 딱지가 붙어 마땅한 사람들은 (돼지가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다면 몹시 부당해서 화병에 걸릴 것이지만) 부당하고 치사한 방법으로 사기를 쳐서 남의 것 빼앗거나 남이 차지해야 마땅한 것을 제 몫으로 차지하려는, 제 눈에는 지옥의 관문으로 보이는 탐욕이라는 끔찍한 정신병에 제 발로 들어가 걸려버린 사들입니다. 왜냐하면 다들 아시다시피 탐욕이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게다가 쓸모나 필요성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더 많이 긁어모으는 데만 온 신경을 쏟게 하는데 탐옥은 그 성질상 절대로 충족이나 만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에서 깨달은 사실은 그보다는 정신적 또는 심리적 탐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자명한 사실은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들은 각자의 속성에 따라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불행한 일 때문에 자해를 하거나 자살을 하는 사람들도 그 모질고 질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해나 자살을 합니다. 그러나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또는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을까요? 일반화의 오류를 무릅쓰말씀드린다면 이런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삶의 어느 특정 시기, 그러니까 아련한 색채가 덧입혀진 행복했던 과거나 아직 오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또는 아마도 찾아 올 행복한 미래의 모습을 상상할 때 행복하다고 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행복했던 순간들이나 행복할 미래의 순간들은 말 그대로 순간일 뿐이어서 마치 더운 여름날 예기치 않게 빰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 줄기 시원한 바람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만약 스치고 지나간 시원한 한줄기 바람을 소유하고야 말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여길 텐데 저는 행복, 아니 행복하다는 감정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그 성질상 소유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이런 바보 같은 상상을 해 보시지요. 그토록 좋아하지만 너무 비싸서 먹기 힘들었던 랍스터를 배 불리 먹을 기회가 생겨 양껏 먹었 데도 아직 접시에 충분한 양의 랍스터가 남아 있어서 몹시 아깝기는 하겠지만 배가 차서 억지로 더 먹었다간 구토가 날 것 같은 상황에서 내가 이 귀한 랍스터를 남기기 아까우니 맛있게 다 먹어서 행복감을 좀 더 오래 많이 느끼자라고 마음먹는 사람이 있다면 우린 그를 역시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첫 장만 읽고서 기분이 영 불쾌해져서 책을 덮고 더 이상 읽지 않았던 노자의 책에 나오는 것처럼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넝쿨째 굴러온 호박처럼 행복이 저절로 느껴지기보다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해야 함은 뻔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린 행복해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리 어렵지 않은데 인간 모두에게 존재는 행복하고 싶은 욕구를 계속 채우면 됩니다. 그런데 다들 잘 아시다시피 행복하고 싶은 욕구는 어느 순간 충족되었다고 사라질 수 없습니다. 이를 탐욕과 혼동할 위험이 있는데 탐욕은 행복감과 달리 성취의 기쁨이나 즐거움뿐만 아니라 성취해 가는 과정의 기쁨이나 즐거움이 없을뿐더러 마치 노예에게 채찍질을 하듯 탐욕은 기쁨은커녕 더 많이 더 빨리 하면서 인간을 쉴 새 없이 채찍질해서 사람의 마음을 공허하게 만들고 녹초가 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의미의 행복을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그러한 행복의 가장 밑바탕이 다름 아닌 자기애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헬조선이라고 불는, 개인의 행복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지금의 한국사회에서 자기애를 실천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어서 때론 조롱이나 근거 없는 비방이나 비난을 들을 위험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이나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방향이나 취향은 자신이 가장, 아니 어쩌면 유일하게 잘 알고 있으니 현재 자기 안에서 꿈틀거리면서 충족되기를 바라는 욕구들을 정직하게 인정하면서 자신이 처한 현실 속에서 어땋게 하면 (어느 정도라도)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 나갈 수 있을까를 때론 당연히 외롭게 혼자서 곰곰이 생각하고 실천해 보는 것이 자기를 지키고 위하는 자기애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대세가 무엇이든 평양감사도 자기가 싫으면 하지 않는 식으로 자기가 자기 자신을 돌보고 아끼면서 남이 뭐라 하든 정직한 자기 자신의 욕구들을 실현하려고 애쓰는 그런 장하면서도 지극히 인간적이어서 고운 모습 말이지요. 그리고 이를 통해 타인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자기애의 욕구를 가지고 있지만 그 욕구의 구체적인 모습은 나와 타인이 같은 생김새를 가지고 있지 않듯이 다소 또는 많이 다를 것임을 인정할 때 우린 나의 자기애를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타인의 자기애를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는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내적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타인의 취향이나 관심이 갑작스레 나의 마음에 들게 되는 것은 아닌데 이는 자기의 욕구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존중하는 한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그래서 저는 젊을 때 본 어느 일간지에 실린 네 컷짜리 만화에 나온 글인 "사랑하는 연인이나 부부는 같은 곳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는 말을 무척이나 싫어합니다. 우선 같은 지향점을 누가 정할 것이며 애인이든 배우자든 나와 다른 취향과 관심과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서 나와 다른 환경에서 오랫동안 자랐는데 어떻게 같은 목표나 지향점을 정할 수 있는지 알 수 없고 만약 어느 연인이나 부부가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남자 쪽이 치사하게 그것이 사랑의 표현이라면서 자기 취향이나 관심사를 여성에게 사실상 강요할 것은 거의 뻔한 일입니다. 다만 연인이든 부부이든 나와 같이 상대방도 행복하고자 하는 공통된 선천적인 욕구가 있음을 정직하게 인정한다면 상대방의 다름을 존중하면서 상대방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옆에서 지지하고 필요할 때 도움의 손길을 조심스레 내밀 수 있을 것입니다. 자연이 인간에게 단 한 번만 허용한 소중한 삶을 잘 살아내고 싶다는 공통된 지향점을 함께 바라보면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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