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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태진 Sep 17. 2021

내 아이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

오늘 식사를 하면서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자 제가 젊은 시절부터 좋아했던 인간극장이라는 다큐 프로그램이 눈에 띄었는데 제목이 "버섯집의 작은 아씨들"이었습니다. 속세(?)를 떠나 산골에 너와지붕을 얹고 벽은 황토로 지은 그리 크지 않은 집에서 중년의 부부와 첫째가 15세인 네 자매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보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히는 모르지만 돈이 우선시 됨을 넘어 숭배의 대상이 된 탐욕스러운 세상이 싫어서 신문도 배달이 되지 않는 산골로 들어간 듯 보였습니다. 게다가 네 명의 딸들은  학교에 다니 않고 이른바 홈스쿨링을 통해서 혼자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눈을 잡아 끈 장면은 이제 겨우 중학교 3학년 나이인 첫 딸이 부엌에서 능숙한 손놀림으로 호박 등을 잘라서 음식을 만드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장면이 지나서 방송이 끝난 뒤 제 머릿속에는 화두처럼 "성장"이라는 단어가 떠 올랐습니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의문이 새삼 다시 떠 올랐는데 그건 "인간은 왜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부모의 돌봄과 양육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입니다.


짐작일 뿐이지만 단언컨대 자녀의 건강한 성장을 바라지 않는 부모는 이상한 부모 말고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장이라는 모호하고 막연한 개념에 뜻풀이된 내용을 채우게 된다면 적지 않은 한국의 부모, 특히 엄마들은 당혹감과 함께 화를 낼지도 모릅니다. 즉 성장이란 영재교육이나 조기교육을 통해 문제풀이 능력만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어릴지라도 누려 마땅한 권리인 자유를 통해서 스스로의 재능과 소질을 발견해서 키우고 공부만이 아니라 친구들과 놀이를 하면서 겪게 되는 이런저런 긍정적 또는 부정적인 경험을 통해서 사회적인 능력을 키우는 것이 성장이다라고 말한다면 말이지요.


최근에 알게 된 영어단어인데 한국말로는 "엄마들의 치맛바람" 또는 "극성"으로 거칠게 번역될 수 있는 영어단어가 헬리콥터 맘(helicopter mom)으로 이 단어를 접하자 제 눈앞에는 공중에 낮게 떠서 한 자리에서 맴도는 헬리콥터가 어른거렸습니다. 극성스러운 엄마에게 그런 명칭이 붙은 건 다름 아니라 혹여 아이가 잘못될까 봐 몹시 불안하고 두려워서 자기 손으로 미리 다 알아서  챙겨주면서 아이는 손 하나 까딱하자 못하게 하느라 아이 곁을 좀처럼 떠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코로나가 돌기 전 어느 날 저녁에 집으로 가는 전철 안에서 제 건너편에 젊은 부부와 아직 유치원에 갈 나이도 되지 않아 보이는 앳된 계집애가 앉아 있었는데 그들을 보다가 제 입에서는 저도 모르 낮은 탄성졌습니다. 그 이유는 젊은 엄마가 아이에게 자신의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여 가면서 손동작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장면을 보고 나서 저는 독일에 간 뒤 아내에게 양파가 들어간 감자볶음부터 음식을 만드는 법을 배웠던 기억이 절로 났습니다. 예전에 밥을 먹을 때 미각과 시각을 통해서 아, 이 음식에는 간장과 마늘 그리고 설탕이 들어갔구나 하는 막연한 짐작을 하기는 했지만 정작 제 손으로 음식을 만들자니 칼질부터 시작해서 소금이나 후추는 얼마나 뿌려야 하는지, 밀가루를 반죽하려면 물을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몰라서 음식이 짜게 되거나 반죽이 너무 질어질 때도 있었습니다. 제 자랑입니다만 이른바 그런 기초과정을 마친 다음에야 저는 비로소 아내에게 일일이 묻지 않고도 음식을 맛있게 만들 수 있게  되었고 다른 음식에도 도전해 볼 수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제가 청소년일 때부터 귀가 아프게 들어왔던 말이 "빨리빨리 문화"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그 문화에는 굼뜨고 게으르다는 의미가 아니라 숙성의 시간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기다림의 능력이 사회적 관습에 의해 철저히 봉쇄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그런 기다림은 실수나 과오를 인정하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떤 더 나은 다른 선택지가 있는지 성찰해 보기 위해 시간을 소요하는 성격의 기다림일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과도하고 심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공부는 재촉하면서 그 나이에 차츰차츰 겪어야 할 경험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제 눈에 어이없고 잔인해 보입니다. 제 초등학교 동창생인 소설가 공지영이 쓴 책 속의 한 구절인 "삶은 흔들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라는 표현처럼 그 아무도 전혀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때로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듯 암담하고 두렵기도 한 경험을 한번도 하지 않고, 게다가 머릿속이 헝클어진 실뭉치처럼 뒤죽박죽이어서 혼란해 보지 않고 일직선처럼 삶을 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이제 겨우 구구단을 외운 아이에게 어려운 미분적분 문제를 풀라고 하듯이 너무 어렵고 난처한 과제를 주어서는 안 되겠지만 어른의 눈으로 볼 때 시시하고 단순한 일로 보일지라도 아이들에겐 조금 벅차서 연습이 필요한 과제 정도는 맡겨야 느린 성장이 가능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때 어른들이 주의해야 하는 점은 억지를 쓰면서 마치 자신에게 최면을 걸듯 "내 아이는 잘 해낼 거야. 나는 내 아이를 전적으로 신뢰해"하지 않고 "이제 제 손으로 과제를 수행하려고 애쓰는 미숙한  아이가 제대로 하지 못하면 어쩌나"하는 불안을 정직하게 인정하면서 혹시 아이 혼자 도저히 그 과제를 수행하지 못할 때, 그래서 아이가 "엄마, 이건 어떻게 해야 돼?" 하면서 도움을 청할 때 아이의 꾸준한 성장 가능성을 신뢰하면서 힌트를 주듯이 작은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에 대한 신뢰를 제가 몇 달 전 산 "어이라는 세계"라는 책 속에 나오는 어떤 아이의 말로 표현하고 싶은데 그건 "선생님, 느리고 서툴지만 저도 혼자서 할 수 있어요. 다만 어른들이 제게 시간을 준다면 말이에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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