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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태진 Sep 16. 2021

불안과 함께 살아가기

오늘 저녁은 좀 늦어서 중앙일보 케이블 채널인 jtbc 뉴스를 보면서 먹었습니다. "세상이 말세"라는 표현은 젊을 때부터 익히 들어온 말이지만 뉴스를 보던 제 입에서는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 지경까지"라는 말이 새어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언젠가 어떤 영화 속 대사인 "요즘 우울증 약 먹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이상한 거지"라는 말이 떠올라서 그게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식사를 끝낼 때쯤 뉴스도 마지막 꼭지인 일기예보로 이어졌는데 티브이에서 물러나 담배 한 대에 불을 붙이면서 불안장애니 분노조절장애니 충동조절장애니 하는, 우울증과 매우 관련성이 높은 심리학적 용어들이 떠 올랐습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요즘 한국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어찌 해소하기 힘든 화, 즉 분노가 가득 차 있는데 그 화를 일으킨 당사자는 이른바 돈과 권력을 뒷배 삼아 어처구니없고 말도 안 되는 갑질을 마구 해 대는 사람이어서 마치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한다"는 속담처럼 자기 화를 풀기 위해 상대적으로 만만한 을을 찾는 먹이사슬 같은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도 오래전에 접한 책이라서 글쓴이가 누군지 잘 기억나진 않지만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책을 얼핏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인도처럼 강고한 신분질서가 지배하고 있어서 신분이동이 불가능한 사회라면 마치 포커 게임을 하는 갬블러처럼 불확실한 확률 계산을 하느라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연신 마른침이 꿀꺽꿀꺽 넘어가는 불안을 경험하기 힘들겠지만 그 확실성은 행복이긴커녕 염세주의적 운명론에 빠지게 하는데 신분이 낮은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은 다음 생애에는 높은 신분의 가문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불안이 달가운 감정은 아닌데 불안이라는 감정은 해소되고자 하는 동력을 부추겨서 심리적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에너지를 소모하게 하고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어서 정신과 신체를 녹초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불안은 자신의 의지나 바람과는 달리 주의를 온통 불안을 일으킨 문제로 향하게 해서 물리적 시야뿐 아니라 정신적 심리적 시야도 협소하게 만들어서 까딱 잘못하면 그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조급한 마음 때문에 경솔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막심한 후회를 하게 만드는 심리적 물질적 손해를 야기하기도 합니다.  


동의하지 않는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저는 현재가 자본주의의 황혼기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의 생산과 축적이 지상의 목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체재가 유지되려면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큰 기둥인 경쟁을 바탕으로 자신이 창출한 상품과 서비스를 화폐를 통해 대가를 지불하면서 구매하고자 하는 소비자층이 존재해야 하는데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에 중국이라는 광대한 시장이 형성되고 발전하면서 잠시 그 속도를 늦췄지만 시장은 점점 더 포화상태로 가고 이는 노동자를 싼 값에 부리거나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이전보다 더 적은 수의 노동자들이 과거에 비해 높아진 노동 강도를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함으로써 시장에서 구매력을 갖춘 소비자의 수를 점점 줄어들게 만드는 악순환을 그리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런 환경은 흔한 표현처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안한 상태를 야기해서 인간의 신경을 좀먹어 들어가기도 합니다. 


이런 사회적 경제적 상황은 당연히 불안을 야기할 수 있는데  저는 요즘 대학생일 때 앍었던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소설가이기도 한 카뮈의 <페스트>라는 소설을 떠올리곤 합니다. 읽으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 소설을 짤막하게 말씀드리자면 프랑스 어느 작은 도시 갑자 를  토하고 죽은 쥐들이 나타나고  페스트가 번지면서 그 도시는 안으로 들어가지도 밖으로 나오자도 못하는 봉쇄 조치가 내려집니다. 도시가 봉쇄되기 전에 아내를 다른 도시로 대피시킨 의사 뤼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해서 봉쇄된 도에서 페스트에 걸려 고통받는 환자들을 치료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 중에는 페스트로 인해 결국 죽 되는 환자들도 생깁니다. 소설은 마자막으로 가면서 그 도사 창궐했던 페스트가  의사 뤼 등의 노력으로 줄어들어서 읽는 로 하여금 아마도 페스트가 물러가고 그 도는 예전의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는 해피엔딩으로 끝날 거라는 희망을 갖게 하지만 그 소설의 맨 마지막은 "피 토하고 죽은 쥐들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불길하고 우울한 문장으로 끝이 납니다.


 그 마지막 문장이 불러일으킨 느낌은  이렇게 표현해도 좋다면 많 흐릿해지긴 했어도 제 의 감각세포들에 아직도 선명히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서 바로 든 느낌은 마치  갑자기 숨이 콱 막히는 듯한 섬뜩한 느낌이었는데 제 머릿속에서 그 마지막 문장이 사회적 경제적 모순들이. 발견되었어도 딱히 해결할 방법 없고 어떤 사회적 또는 경제적인 모순이 해결된  싶어도 그것이 우울하고 기가 막힌 다른 모습의 모순된 현실로 바뀌기도 하는,  내가 발을 딛고 사는 아 곳, 바로 여기 지금의  모습에 대한 비유라는 생각이 들자 저도 이해하기 힘든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는데 지금 돌이켜 보니 그때의 느낌은 아주 어릴 적 뱀파이어라는  무서운 영화를 보다가 예상치 못한 무서운 장면갑자가 나와 몹시 놀란 뒤 그때부터는 갑자가 무서운 장면아 또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서 긴장된 마음으로 스크에 집중했을 때  숨이 조금은 편해졌던 느낌과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저는 사람이 전혀 불안해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가능성은 없고 아은 마음에서 확실한 느낌으로 자리 잡지는 않았지만 전혀 불안을 느끼지 않고 사는 삶이 정신적 심리적으로 건강한 삶이 아니라고 느끼고 있는데 막연한 얘기지만 불안이 전혀 없다면 사람에게 희망, 제가 즐겨 쓰는 표현으로 말씀드리자면 "여린 희망"을 품는 게 가능할까, 또는 사람이 무엇에 이끌려 자신의 삶과 함께  자신이 속 공동체의 변화와 발전을 이루려고 할까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때 내가 당할만한 수준의 스트레스를 줄 뿐만 아니 흐릿하게나마 그에 대한 해결 가능성이 엿보일 경우에만 해당되는 말이겠고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전혀 보아자 않는 위험이나 우연적인 재난과 불행은 그 경우에 해당되지 않을 터여서 에 의해 야기되거나 지금은 딱히 풀 길 없는 문제로 야기되는 불안은 내 능력 밖이라고 여기면서 그런 이 현실로 닥치지 않기만을 바라는 것 외 달리 다른 방도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자기에게 닥칠지도 모를 불안을 완벽하고 완전제거하려다가 더 크고 암담한 악순환적인 불안에 사로잡히지 말고 지금 내가 이러저러해서 불안하다는 상태부터 정직하게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각합니다. 그래야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더라도 얼추 계획을 세워서 예상되는 그 불안으로부터 조금은 벗어날 수 있는 가능 보이확률적 방법을 강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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