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태진 Sep 16. 2021

상위 1% 부자는 행복할까?

성격심리학 이론 중에 공격성의 원인에 대한 이론이 있는데 그건 바로 욕구불만입니다. 잠깐 다른 얘기를 하자면 심리학자 마슬로우는 욕구 위계론이라는 이론을 정립했는데 마치 피라미드 모양으로 맨 밑바닥, 그러니까 욕구 중 가장 기본을 이루는 욕구인 생리적 욕구 그리고 그 위로 안전의 욕구, 애정 및 소속 욕구, 존중받고 싶은 욕구 마지막으로 자아실현 욕구가 있으며 하위 단계의 욕구가 (주관적으로) 충족되어야 상대적으로 상위의 욕구가 나타나서 충족을 요구한다는 이론입니다. 저는 이런 그의 이론 중에 그런대로 잘 맞는 욕구는 생리적 욕구라고 생각하는데 배 고프고 춥고 지친 몸을 뉘일 마땅한 거처가 없다면 상위 욕구가 나타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 다른 상위의 욕구들은 비록 나타나 충족을 요구하진 않지만 잠재적 형태로서 우리 마음에 늘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마슬로우는 생리적 욕구가 주관적으로 충족되어야 상위 욕구가 나타난다고 했는데 주관적인 충족도 애매모호한 말이지만 소위 갑부나 부자로 분류되는 상위 1%의 사람들, 그러니까 자신의 생리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정도를 훨씬 넘어설 정도로 엄청 난 부를 소유한 사람이라면 상위 욕구들, 특히 자아실현 욕구가 나타났을 텐데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건 삼척동자도 알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주제에서 좀 벗어난 글을 원 위치로 돌려서 글을 잇자면 공격성을 유발하는 중요한 욕구는 무엇일까요? 물론 생리적 욕구의 심한 결핍도 공격성을 유발할 수 있겠지만 이 경우 이 변수를 자극하는 변수는 이른바 불공정하다는 윤리적 판단입니다. 즉 나의 생리적 결핍이 나 때문이 아니라 외부에 존재하는 타인이나 환경(법, 제도 등) 때문이라고 판단하면 부당하다는 느낌과 함께 공격성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낼 것입니다.  이 논리에 바탕을 두고 말씀드리자면 아주 소수를 제외하고 요즘에 무상급식이나 급식 쿠폰 제공 등으로 인해 밥을 굶는 아동이나 청소년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같은 반 친구가 "쟤는 가난해서 무상급식 제도가 없었으면 점심밥을 굶었을 걸"하며 비꼬거나 비하하는 말을 당사자가 듣는다면 굴욕감과 함께 분노가 치솟는 것을 느낄 텐데 이 느낌은 마슬로우의 욕구 위계론을 빌자면 "존중받고 싶은 욕구"가 좌절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마슬로우의 피라미드식 욕구 위계론이 상향식으로 나타난다기보다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마치 연극무대의 조명에 비치는 배우들처럼 강하게 드러났다가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드러나는 것을 반복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아동들이나 청소년들에게 결핍되어 욕구불만을 일으키는 중요한 욕구는 무엇일까요? 저는 존중받고 싶어 하는 욕구라고 생각합니다. 즉 나의 취향과 재능과 능력을 펼쳐 보이고 싶은 욕구(자아실현 욕구)가 존중받기는커녕 그랬다가는 좋은 성적도 못 받고 좋은 대학도 못 가서 삶이 고단해질 거라는 상시적인 협박과 조롱 때문에 정작 잘할 수 있고 매우 하고 싶은 일을 못해서 자기도 어쩌기 힘든 화가 치밀어 오를 수 있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와 실존>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두 개념을 인간의 욕구에 적용하면 인간의 모든 욕구는 잠재적 성질로서 우리 안에 존재하고 내적 결핍과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충족을 원하는 실존적 욕구로 드러나게 되는데 생리적인 욕구는 충족되면 배가 다시 고파지거나 잠이 다시 올 때까지 드러나지 않지만 존중받고 싶은 욕구나 자아실현 욕구 등은 결핍이 존재할 때 드러나긴 하지만 생리적 욕구와는 달리 완전한 충족을 요구하지도 않고 요구할 수도 없는 그 이유는 그런 상위 욕구들은  자존감과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욕구와 자기 확장성이 상호작용하면서 주관적으로 결핍을 견뎌야 하는 경우도 있 정신분석학자 라캉의 표현인 주이상스라는 개념을 빌려 말하자 그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자기 정체성, 그것도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변화하고 확장되는 자기 정체성, 그리고 그 누가 조롱하고 비난해도 나 자신만큼은 스스로를 존중하는 자기 존중감에 바탕을 둔, 그 누구도 아닌 "나"라는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정체성을 유지고 성장시키기 위해 소속감이나 외부의 안정 등의 결핍을 감수하면서 마치 한 걸음씩 산을 오르듯이 삶이 다할 때까지 충족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 외로움을 감수하며 견뎌야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나 소속감에 대한 욕구 그리고 존중받고 싶은 욕구 등의 완벽하고  상실되지 않는 충족을 바라게 되어 병적인 집착의 성격을 띠게 된다면 이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은 탐욕으로 변질되어서 마치 헤어 나오려 할수록 점점 더 천천히 빠져드는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듯한 악순환을 초래할 위험이 있을 것입니다.  특히 누군가 옆에서 항상 지원하고 인정해 주지 않으면 몹시 불안해하는 편집증적인 소속감에 대한 욕구는 자신의 독립, 달리 말해서 외로움을 견디면서 스스로의 능력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독립을 위해서 불안한 마음을 견디며 그 독자적 능력을 보듬고 키우지 않는 한 심한 경우 엄마나 친구들이나 동료들이나 익명의 권위라고도 불리는 여론에 휘둘리는 개성 없는 좀비 같은 처지를 야기시킬 수 있는데 절대로 충족될 수 없는 소속감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시도할 수 있는데 그 욕구가 충족될 수 없는 이유는 보듬고 키워내야 하는 개성과 독자적 능력을 가진 자기 자신을  끝도 없고 헛된 그 욕구를 위해 버란 결과 바로 "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건 물을 담을 독을 버리고 우물가에 가서 남들이 우물을 길어 담는 것을 보고 부러워하면서 어떻게 하면 나도 저들처럼 우물을 길어 담을 수 있을까만 상상하는 몹시 어리석은 사람에 거칠게 비유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작가의 이전글 인간은 본래 선한가, 아니면 악한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