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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태진 Sep 18. 2021

하루하루의 일상 속에는 삶의 의미가 있을까?

오늘도 어떤 분운 잠이 들기 전에 뉴스로 오늘 발생한 코로나 확진자 수를 듣고 막막함과 싱숭생숭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다가 잠에 빠진 분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 손을 자주 씻고 외출 시에는 마스크를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는 안내방송을 자주 듣고 그렇게 따라 하고는 있지만 손을 자주 씻는 것보다 외출 시 마스크를 착용하는 일은 번거로움을 넘어서 답답하고 귀찮은 일인데 하루하루의 생계와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밖에 없는 직장에 다니는 분들은 "설마 내가 코로나에 걸리겠어"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에 답답한 마스크를 좀처럼 벗을 수 없는 분들도 적 않을 것입니다.


제가 가입해 보고 있는 어느 밴드에 올라온 글 중에 별생각 없이 무심코 지냈던 일상이 코로나의 급습으로 하루아침에 깨져버린 것을 두고서 그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이제야 절감하게 되었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그건 자신의 건강에 대해 자신만만하다가 느닷없이 중병에 걸린 사람이 그전에 자기의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제야 절감하는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 신경 쓸 계기도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당연시 여기던 그런 일상 말이지요. 저는 그 글을 읽고서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고등학생일 때 읽었던 어느 유명한 수필가의 수필 속 한 구절을 떠올렸습니다. 너무도 오래전이라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유독 제 머릿속에 남아 있는 구절의 내용은 다름 아니라 “내일 죽는다고 생각하고 오늘을 살아라”이었습니다. 당시 죽음을 실감하면서 생각하기엔 아직 많이 어린 나이였지만 저는 그가 왜 그런 표현을 썼는지 그리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는데 그건 하루하루로 이어지는 삶을 낭비하지 말고 충실히 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구절을 읽고 바로 그의 말이 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몇 초도 지나지 않아서 저는 마치 공기가 매우 탁한 실내에 있는 듯이 잠시 숨이 막히고 몸의 근육들이 긴장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런 불쾌한 느낌이 갑자기 왜 생기는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는데 그건 그의 말이 교과서적으로 맞긴 하지만 그렇게 살다가는 정신과 몸이 너무 긴장해서 심하면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그 표현은 엉뚱하게도 그 이전에 접한 철학자 스피노자의 경구를 떠올리게 했는데 다들 잘 아시는 경구로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이었습니다. 그 경구는 참 씩씩하고 용기 있는 표현으로 제게 다가왔지만 대학생활을 마치고 취업을 한 뒤 어느 날 그 경구가 다시 떠올랐는데 그 경구가 머릿속에 떠오르자 저는 마치 제 앞에 스피노자 선생이 있는 듯이 그에게 이런 말을 해 주고 싶었습니다. “스피노자 선생님. 선생님의 말은 무척이나 씩씩하긴 하지만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동안 이런저런 현실적인 이유로 하고는 싶었으나 해 보지 못했던 일 중에 하루의 반나절 정도 시간이 소요되는 일을 경험해 본 뒤 미리 준비한 수면제를 과다하게 복용해서 끔찍한 재앙이 닥치기 전에 자살을 해서 편히 눈을 감고 싶군요”라고 말이지요.


저는 위에서 <일상>이라는 표현을 여러 번 썼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 일상은 단색의 일상이 아니라 여러 결과 색이 어우러진 그런 일상입니다. 이를테면 자명종 소리에 뜨기 싫은 눈을 억지로 뜨고 얼른 아침밥을 차려 먹고 서로 최소한의 간격도 유지할 수 없는 빽빽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직장에 가서 좀 과장을 하자면 이제는 눈을 감고서도 할 수 있는 지루하고 판에 박힌 일을 하다가 정오가 되면 오늘은 또 무얼 먹지 하며 잠시 고민하다가 점심식사를 하고 남은 점심시간 동안 그래도 말을 섞을 수 있는 동료나 바로 위 또는 아래 선후배와 별 의미도 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커피 한잔을 마시거나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다시 업무에 복귀해서 오늘은 쓸데도 없는 회의를 하지 않고 칼 퇴근은 아니어도 좀 일찍 퇴근하고 싶다, 그리고 친구를 불러내서 술 한잔을 같이 할까 아니면 집에 일찍 가서 저녁을 먹은 뒤 드라마를 볼까 아니면 컴퓨터로 포커나 고스톱을 할까 고민하다가 갑자기 맡겨진 특별 업무나 식상한 회의가 길어져서 표현은 못해도 속으로 온갖 욕을 하고 가로등 불빛과 거리를 지나는 차량이 없었더라면 칠흑같이 어두운 밤 시간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가서 뻗어버리는 그런 일상 말이지요. 어쩌면 침대에 피곤한 몸을 뉘이고도 해 봤자 쓸데없어 보이는 이런저런 잡념과 고민 때문에 쉽게 잠들지 못하는 그런 모습도 일상에서 빠지지 않겠고요.


그런데 그렇게 식상하고 지루하고 천편일률적인 일상의 모습들우리 삶에서 갑자기 빠져버리면 우린 당황하게 되고 심하면 공황상태(panic)에 빠지기도 합니다. 속으로 내게 왜 이런 일이,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남들은 다 잘 사는데 어째서 내게 이런 불행이 닥치는 거야?”하면서 말이지요. 그건 사실상 강요된 원치 않는 이른 퇴직일 수 있고 자녀가 당하는 학교 내 폭력이나 왕따일 수도 있고 갑작스러운 부모님의 병환일 수도 있고 정말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친구의 채무에 보증을 섰다가 친구가 종적을 감춘 뒤 느닷없이 날아든 빚 독촉일 수도 있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몸의 불편한 상태가 알고 보니 심각한 질병으로 판정되어서이기도 하고 반복적이고 지루한 업무 외에 위에서 느닷없이 요구하는 황당한 업무, 그러니까 옷을 벗기 싫으면 무조건 하라는 식의 업무지시일 수도 있습니다. 우린 그런 경우들을 흔히 반복되는 <일상의 파괴>라고 하기도 하고 <위기>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가왕(歌王)으로 불리지만 이제는 흘러간 가요를 주로 틀어주는 라디오 방송에서도 잘 듣기 어려운 조용필 씨가 부른 노래 중에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라는 노랫말에는 “소중한 건 옆에 있다고 먼 길 떠나려는 사람에게 말했으면”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 노랫말을 듣고 저는 아주 오래전에 그러니까 제가 아직 어린 아이였을 때 읽었던 <파랑새>라는 동화를 떠올렸습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 동화는 파랑새를 찾아 먼 길을 떠난 남매가 결국에 잃어버린 파랑새는 집의 새장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런데 조용필 씨의 그 노래와 파랑새라는 동화가 제 머릿속에 떠오르니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우린 어쩌면 삶의 많은 부분을 헤매고 방황하는데 쓰지만 아직 그렇게 방황하고 헤매 보지 못한 사람들도 삶의 어느 순간에 의식적으로 또는 무언가에 끌린 듯이 어떤 것을 찾아 나서기 때문에 미 자기 곁에 소중한 것이 있음을 오랜 경험으로 깨달은 사람일지라도 타인에게, 그게 가족이든 친구든 후배든 누가 되었든 소중한 것은 바로 곁에 있으니 방황하거나 헤맬 필요가 없다고 섣불리 말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말이지요.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아직 헤매거나 방황해 보지 못한 사람이 두려움과 슬픔과 절망과 분노 그리고 막막함을 동반하기도 하는 오랜 시간의 헤맴과 방황을 경험한 사람에게 그제야 내 곁에 있는 것들이 소중한 것으로 다가오는 주관적인 느낌을 몸과 마음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겠지요.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가 아직 내 곁에 있는 파랑새, 그것이 삶의 의미든 목적이든 아직 발견할 가능성이 남아있는 동안 숨을 헉헉대고 이 지옥 같은 일상을 벗어나서 자유롭고 평안하고 싶다는 절박한 욕구 때문에 미처 눈길을 주지 못한 나 자신의 일상에 잠시라도 눈길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이 제게 더 절박해진 이유는 작년 가을엔가 중학교 때 반에서 1,2 등을 놓치지 않아서 이른바 SKY 대학 중 한 군데를 졸업한 뒤 상위 10%에 속하는 신의 직장에서 근무하다가 몇 년 전 아내와 사별하고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지금은 요양병원의 침대에 누워있게 된 어느 중학교 동창의 소식을 우연히 접하고 나서입니다. 한동안 라디오에서 자주 나왔지만 이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김연자의 <아모르파티> 노랫말에는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 가슴이 뛰는 대로 가면 돼”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 내용이 아주 잠시 마음을 흐뭇하게 할진 모르지만 저는 어쩔 수 없이 점점 좁혀지는 삶의 기회들을 느끼곤 합니다. 그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에서 가해지는 사회적 경제적 제약일 수도 있고 그와 무관하지 않은 내적 제약으로 이런저런 질병들이 남의 일 같지 않게 되고 몸이 내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경우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표현은 너무 암울한 느낌을 주어서 쓰고 싶진 않지만 주는 아니어도 신문에서 누구의 부고를 들으면 더 이상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처럼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전에 제가 너무 지치고 막막할 때 듣곤 하는 김민기 씨의 <봉우리> 속에 나오는 노랫말로 제 글에 대한 오해를 피하고 싶습니다. 그 노래는 <사람들은 가리키지, 높고 뾰족한 봉우리만을 골라서>로 시작합니다. 솔직히 저는 요즘 가끔 사람들을 붙잡고 이렇게 말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낍니다. “지하철을 타려고 집을 나서서 역 근처에서 마주치는 떡볶이 아줌마나 야채를 파는 할머니들, 그리고 길거리에서 가끔 보는 구둣방 아저씨들에겐 삶의 의미란 없을까요? 어쩌면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도 몰라요. 누구나 부러워하는 사회적 경제적 위치에 도달하는 것, 내 자녀가 좋은 대학 나와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직장에 입사하고 브랜드 명칭만 들어도 남들을 주눅 들게 만드는 비싸고 넓고 고급스러운 아파트를 장만하는 것, 아니면 이 개 같은 세상을 갈아엎고 모두가 평등하고 모두가 자유롭고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며 노력하는 것만이 삶의 진정한 의미고 말이지요.


 하지만 저는 묻고 싶습니다. "당신들이 가리키는 삶의 의미가, 그로 인해 느껴지는 행복이 과연 어디에 있느냐고, 당신 눈으로 직접 보았냐고, 그 길을 내 눈앞에 보여달라고, 또는 그런 경우에만  삶의 목적과 의미가 있느냐"라고 말이지요. 물론 그런 삶이 옳지 못하다고 냉소를 지으며 경멸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우린 기력이 거의 소진되고 이제는 사물을 식별할 수 있는 시력만이 희미하게 남은 뒤 “아, 바로 내 곁에, 어디도 아니고 바로 내 곁에 삶의 의미가  있었구나”하면서 땅을 치고 후회하는 것만은 피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자면 내게 남아 있는 삶의 가능성들과 남들이 에이 시시해하며 비웃을지라도 나만의 삶의 의미, 아주 작고 평범해 보일지라도 내 곁의 삶의 의미에 눈길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잊어버렸지만, 또는 잃어버렸지만 아직은 발견할 수 있을 때 또는 되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을 때 말이지요. 그럼 말한 김에 김민기 씨가 만든 봉우리라는 노래의 맨 마지막 부분을 말씀드리는 것으로 글을 맺습니다. "하여 친구야,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바로 지금 여긴지도 몰, 우리 땀 흘며 가는 여기 숲 속에 좁게 난 길, 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 그래 친구야, 바로 여긴지도 몰라,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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