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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태진 Sep 18. 2021

자녀에 대한 엄마의 불안감, 그 이유는?

자녀를, 특히 어린 자녀를 가진 부모들에게 자녀가 자율적이고 독립적으로 살게 하고 싶은가?라고 물어본다면 이상한 부모가 아니라면 그 어느 부모도 아니라고 답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막연한 질문을 보다 구체적으로 만들어서 제시한다면, 이를테면 자녀가 핸드폰을 가지고 오랫동안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아이돌 그룹의 노래와 동영상을 즐겨 보는 경우에도 자녀를 믿고 자녀에게 선택과 결정을 오롯이 맡길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적지 않은 부모들, 특히 엄마들은 당혹감을 쉽게 감추지 못할 것입니다.


 자녀, 특히 어린 자녀는 얼핏 보기에 모순된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엄마의 보호와 돌봄을 간절히 원하면서도 아직 익숙하지 않아 서투른 일을 제 손으로 해 보려는 욕구 말이지요. 하지만 이런 모순되어 보이는 욕구들은 서로 보완적인 기능을 담당하는데 이는 다름 아닌 인간의 물리적 정신적 한계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한번 이런 상상을 해 보시지요. 분명히 걸음마는 옆에서 가르쳐 주지 않아도 선천적인 능력과 욕구에 바탕을 두고 스스로 익히는 행동발달입니다. 하지만 이제 갓 태어난 젖먹이 아이가 산후조리원에서 엄마가 힘들어하니까 얼른 씩씩하게 걸어야지 하면서 바로 늠름하게 걸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현실을 무시하고 공상, 아니 망상에 빠진 정신 나간 사람일 것입니다.


썰렁해 보이는 농담 같은 말을 굳이 한 이유는 자율성이나 독립성이 막연하게 좋아 보이긴 하지만 인간의 자율성과 독립성은 생애 발달단계의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해 보려는 욕구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어른의 눈으로 보기 시시하고 유치해 보이더라도 아이들은 그 문제들을 인간으로서의 일반적 속성과 능력 그리고 개인적인 관심과 능력을 바탕으로 해결하려고 애도 하는데 때로는, 아니 어쩌면 대부분 아직 서투른 능력 때문에 이런저런 실수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그들 안에 잠재되어 있는 소질과 능력을 조금씩 천천히 키워갈 때  생기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  가지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자율성과 독립심이 점점 더 커질 것입니다.


 물론 그런 경험들을 통해서 현실적인 상황의 한계와 자신의 한계를 좀 더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도 무시하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데 건강한 자존감이란 만물박사가 되어야 생기는 것 아니라 자신의 관심을 끌뿐만 아니라 잘할 수 있는 것과 관심 별로 가않거나 잘하지도 못하는 것을 구분함으로써 나와 다른 능력을 가 타인을 존중함과 함께 나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동시에 수용할 때 생기는;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신뢰하는 감정이라고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저는 시행착오라는 표현을 의식적으로 사용했는데 성인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직업활동이나 취미활동을 시작할  때 처음에는 몹시 서투르거나 연거푸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인데 하물며 어린 자녀가 전혀 실수나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 게다가 외부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척척 해 낼 수 있다고 믿는 부모나 반대로 모든 것을 일일히 간섭하면서 가르쳐야만 자녀가 올바르게 클 수 았다고 믿는 부모가 있다면 그들은 어쩌면 아동발달 심리학의 극단적이고 허황된 이론을 종교처럼 숭배하는 몹시 어리석은 부모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자녀교육은  자녀에게 모든 것을 일임해야 자율성과 독립심이 발달한다고 믿는 어처구니없고 위험한 자유방임적인 교육 옳다고 믿는 무책임한  태도이고 후자는 아이에게 잠재되어 있는 씨앗의 형태로서의 선천적인 소질과 능력에 대한 신뢰가  없어서  사실상 모든 것을 독단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전제군주처럼 아이들에게 언어를 통해 심리적인 폭력을 가할 위이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독립심과 자율성은 실패와 실수, 즉 불쾌하고 두려운 시행착오를 스스로 겪으면서 자신 안에 쌓이는 자신에 대한 제한된 믿음일 것입니다. 즉 독립심과 자율성은 예상되거나 우연적인 학습을 통해 천천히, 때론 눈에 띄지 않게 아주 천천 생성되고 강화되는데 이때 외부의 도움이 거의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는 학교에서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서 한글과 구구단을 익히는 과정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외부의 "도움"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옆에서 과연 잘해 낼 수 있을까라는 불안함을 끈기를 가지고 견디면서도 아이가 도저히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서 앞이 캄캄해질 때 조심스럽게 작은 도움을 힌트처럼 주어서 아이가 그 힌트를 바탕으로 다시 용기를 얻어 그 과제에 도전하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옆에서 아를 바라보는 부모, 특히 엄마가 아이가 과연 잘해 낼 수 있을까, 내가 알아서 해 주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부터 정직하게 인정하면서도 저산 어릴 적에 느꼈던 복잡한 감정, 즉 내가 과연 해 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함께 그래도 내 손으로 해 내고 샆어했던 불안한 자신감을 돌이켜 보면서 끈기 있게 옆에서 말없이 자녀를 심리적으로 지지하고 응원해 주는 것입다. 설사 불안한 마음 때문에 "엄마가 대신 해 게"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솟아 오르더라도 말이지요.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점은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는 이분법적인 도식을 벗어나서 아이에게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허용할 것인가와  특정한 행동을 허용하지 않을 때 왜 허용할 수 없는지를 아아의 눈높이에 맞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아이 왜 그 행동을 하면 안 되는지 납득할 수 없어서 떼를 쓰거나 고집을 부려서 결국 부모와 말다툼을 하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렇게 허용하지 않는 이유를 말하는 부모가 자신이 말로 설명하는 이유를 본인도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어야 하겠지요. 한 마디 사족 같은 말을 덧붙이자면 과제를 수행하는 활동에는 정신적 육적 재충전을 위한 휴식이 반드시 필요한데 무한경쟁의 살벌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휴식을, 특히 주관적인 휴식을 시간낭비나 쓸모없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아서 말처럼 실천하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시각은 휴식할 때  비록 눈에 보이진 않지만 우리의 정신과 마음 그리고 육체가 재충전되는 내적인 생산적 활동을 간과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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