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제가 잘 들리곤 했던, 하지만 대형서점의 등장으로 문을 닫을 슈 밖에 없었던 어느 서점에서 어느 날 우연히 피터팬 콤플렉스 신드롬이니 신데렐라 콤플렉스 신드롬이니 하는 제목을 단 책을 접한 적이 았습니다. 그 당시엔 결혼을 해서 자녀를 둔다는 상상을 하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기에 저는 그 제목들이 뜻하는 바를 이해하고 코웃음을 쳤는데 그 책의 저자가 책을 팔아먹을 생각으로 그런 과장된 제목을 달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어서 중년의 문턱에 이른 어느 날 문득 젊을 때 접하고 코웃음을 쳤던 그 표현들이 맞는 것 같다는 불길한 짐작을 했는데 그 이유는 외동딸 외동아들로 태어나서 부모, 특히 엄마의 과보호 속에 살면서 자신만의 취향과 관심과 능력을 바탕으로 차근차근 개성을 키워 펼칠 기회를 많이 뺏겼고 점점 더 살벌해진 입시와 취업 경쟁 때문에 쓸데없는(?) 데에 관심을 기울이기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어느새 성인이 된 사람들이 악성 이기주의, 달리 표현하면 자기 본위적인 정신적 태도를 알게 모르개 몸에 익힌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런 자기 본위적인 정신적 태도를 알게 모르게 몸에 익히게 된 이유는 실존주의의 대표적인 표현인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세상에 내던져졌다"는 표현처럼, 또는 어느 티브이 프로그램 이름처럼 "어쩌다 어른"이 되어버려서 세상을 어떻게 대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고 게다가 이리저리 생각해서 판단하고 결정할 정신적 능력도 부족하지만 그럴 수 있는 틈을 제대로 허용하지 않는 경쟁지상주의를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잔뜩 주눅이 들어 심한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종의 자기 보호 본능처럼 말이지요.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한국사회는 (물론 정도와 가치관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른 나라들에서도) 암묵적인 유교적 가치관에 바탕을 둔 가부장적 정신상태(mentality)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해서 남아선호 사상에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페미니즘과 관련된 신문기사 속 내용을 빌자면 같은 직급이어도 여성은 남성이 받는 임금의 6,70% 밖에 받지 못하고 "유리천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여성이 고위 임원이 되는 경우가 희귀할 정도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자기 본위적인 젊은이들이 예전과 비교하면 더 각박해지고 살벌해진 경쟁 사회 속에서, 다시 말해 이젠 대기업에서조차 정년이 보장되지 않고 출신 대학 같은 학벌의 이유 때문에 대기업 정규직은 고사하고 비정규직으로 채용되어서 같은 일을 하면서도 현격한 임금 차이는 물론이고 상시적으로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사회 속에서 생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생존하려면 곁에 있는 타인의 생존 따위에는 관심을 가져서도 안 되고 심하면 나의 생존을 위해서는 타인의 생존이 위협받아도 어쩔 수 없다고 여기거나 심지어 적극적으로 타인의 생존을 위협하기도 합니다. 그 때문에 부모의 과보호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살아가는 기술이나 방법들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고 타인과 사회적으로 교류하면서 사회성을 제대로 익히지도 못한 젊은이들은 열악하고 살벌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절박한 욕구 때문에, 그리고 인간의 본성상 아무리 외면하고 부정하려 들어도 없앨 수 없는 사회적 관계에 대한 결핍 때문에 두려움과 외로움이라는 만만치 않은 마음의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살벌할 뿐만 아니라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경쟁에 기반한 사회 분위기는 타인을 동료나 친구로 여기게 하기보다는 경쟁자이자 적으로 규정하도록 강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때 사용되는 전략적 방법은 무리 짓기 또는 시쳇말로 패거리 문화입니다. 피 말리는 끝도 없는 경쟁은 타인을 경쟁자이자 적으로 간주하도록 부추기지만 진공 상태가 아닌 사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사는 개인은 자신 앞에 엄청난 존재로 다가오는 사회적이자 동시에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 무력감과 좌절감 그리고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고 그래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같은 이해관계를 가진 타인들과 전략적으로 결속해서 집단적으로 그 문제를 야기했다고 생각 또는 상상하는 공동의 적과 대치해서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런데 유교 가부장적인 한국사회에서 일종의 특권을 누리고 동시에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기대를 받고 자란 젊은 남성들 중 일부는 예전보더 훨씬 좁아진 안정되고 좋은 보수의 직장의 취업 기회에 대한 책임을 다름 아닌 젊은 여성들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물론 예전보다 훨씬 좁아진 취업의 기회와 맞물려 여성의 사회진출 증가로 인해 젊은 남성들의 취업이 위협받게 된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성을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즉 기본적인 욕구인 의식주에 대한 욕구를 충족해야 할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누려야 하는 욕구의 충족을 원하는 똑같은 인간으로 대하지 않고 적이나 방해자로 여긴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한국이 관습적으로 유교적 가치관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않았어도 지금의 한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사회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회여서 오래전처럼 여성을 하류 계층으로 취급하며 남자의 물질적 심리적 욕구 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면서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 때문에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유지 수단인 대화나 토론을 수단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유교를 숭상하던 왕조 사회인 조선시대처럼 자신의 물질적 심리적 이해관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그가 하는 말의 논리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저급한 인간으로 취급하며 조롱하고 비난하기 때문에 자신의 실질적인 이해관계를 주장하고 관철하고자 하면 아주 고상하고 그럴듯한 외피, 즉 명분으로 자신의 실질적인 이해관계를 멋지게 포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프로이트의 용어를 빌자면 마치 구강기의 젖먹이처럼 일방적인 돌봄과 과보호에 익숙한 젊은이들은, 그래서 자신의 고유한 생각, 즉 타인의 입장에 서서 그리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고려하면서 생각하고 고민하고 때론 방황하면서 만들어낸 자신의 고유한 생각과 판단을 스스로에게서 이끌어내 본 경험의 기회를 사실상 많이 박탈당해 온 젊은이들은 여론이나 대중매체를 통한 "지당하신 말씀"을 명분으로 내세워 자기의 실질적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려는 경향을 자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고유한, 즉 이제까지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정신과 마음과 그에 대한 신체의 반응을 통해 스스로 느끼고 생각해 냈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고유한 생각은 외부에서 주입된 멋져 보이는 의견이나 주장과는 달리 자신의 그 주장과 견해에 대한 근거 내지 바탕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고유한 견해나 주장은 생명력 없는 물체와 같은 주입된 생각이 지닐 수 없는 생명력을 지니는데 그 이유는 사유한다, 고민한다, 비교한다, 따져본다, 상상해 본다 같은 생각하는 과정과 함께 실망한다, 두려움을 느낀다, 얼핏 가능해 보이는 희망을 느낀다, 화가 난다, 절망한다 등과 같은 감정들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다름 아니러 나는 내 이익을 지키고 싶다 또는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욕구가 살아 숨 쉬며 자신만의 주장과 견해를 가지도록 부추기고 있는데 자신의 고유한 주장이나 견해란 우선 먼저 스스로가 그 견해나 주장을 납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좀 엉뚱한 말이지만 저는 인간에게는 왜? 와 함께 어떻게?라는 스스로의 질문에 대해 납득하고자 하는 기본적이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욕구가 깊숙이 존재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납득시키지 않고서는 자신의 견해나 주장을 할 수 없고 그렇게 외부에서 주입된 납득하지 못한 주장이나 견해 그리고 우상숭배적인 성격을 지닌 이데올로기를 숭배하며 앵무새처럼 되뇌기를 반복하다 보면 정신과 마음은 이를 납득하지 못하고 그에 저항하다가 지쳐 버려서 자연이 인간에게 선물한 인간다운 생명력도 점점 시들어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