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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태진 Sep 29. 2021

권위주의 그리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6)

한국사회는 오랜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된 뒤 6.25 전쟁을 거쳐서 6,70년대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됐고 독재 군사정부에서 민간정부로 숨 가쁘게 변화해 왔습니다. 이런 표현을 쓰면 불쾌해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민족 간의 전쟁이 끝난 직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꼽히던 한국은 미의 무상원조와 낮은 이자의 차관을 받으면서 급속한 산업화를 이룰 수 있었는데 사회적 제도, 이를테면 교육제도나 사회 시스템을 가장 가까운 나라이고 한국보다 앞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군국주의적인 일본을 본보기 삼아서 산업화와 함께 사회의 근간을 구축했습니다. 이런 급속한 발전은  발전 방향이나 방법에 대해 의혹이나 반대 의견을 허용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을 뿐만 아니 군사독재 정권은 자신의 정통성을 유지하고 강화해야 했기 때문에 더더욱 정의 방침과 결정에 대해 토를 다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이에 저항하는 사람은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론가 끌고 가서 사람을 초주검 상태까지 이르도록 모진 고문을 하거나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로 인해 "" 와 "왜냐하면" 이라는 질문과 대답은 사실상 금기시되어 사람들의 입 밖에서 좀처럼 나올 수 없 되었고 꺼냈다가는 모진 벌을 받다는 사회심리적 도식을 은연중에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국사회에서 왜?라는 질문과 왜냐하면 이라는 설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주된 이유로 유교라는 정치 사회 및 문화 이데올로기를 꼽습니다. 물론 요즘 누구 보고 유교를 믿느냐 또는 숭상하느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과 몸에 밴 도덕적 관습으로서의 유교는 때론 무의식적으로, 즉 무비판적으로 한국인의 정신과 마음 그리고 행동을 지배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데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이지만 유사 종교로서의 유교는 자신의 이데올로기, 즉 법제화 또는 관습화된 사상에 의혹을 품거나 의문 또는 다른 의견을 제하는 것을 잘 허용하지 않거나 설혹 제기된 의문에 답을 한다고 해도 "공자 가라사대,  맹자 가라사대"하며 권위주의적 답만을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공자께서 또는 맹자께서" 하신 말씀이니 무조건 옳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권위적인 답변(?)은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상대적 을의 입장에 있는 사람을 대할 때도 드러납니다. 원로 탤런트인 이순재 씨가 나온 광고의 문구인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위에서 시키는 것이니 무조건 따르라는 식으로 말이지요.


우연한 경우에 어디선가 접한 내용에 따르면 해외, 아마도 미국의 백과사전에 재벌(chaebol)과 함께 화병이 hwabyeong으로 기재되어 있을 정도로 한국의 독특한 정신질환으로 분류된다고 합니다. 물론 이와 비슷한 정신질환으로 우울증을 들 수는 있겠고 다른 나라에도 폭력적인 권위에 장기간 짓눌려서 마음에 병이 생길 수 있겠지만 사회의

윤리적 도덕적 근간이 다른 의견을 수용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복종해 따르지 않는다면  당장에 물리적 심리적 처벌을 가하는 암묵적인 유교 이데올로기적인 태도를 무비판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숭상하는 한국사회에서는 부당하고 납득할 수 없는 지속적인 윗선의 일방적인 명령과 시를  아무 말 없이 따르다가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인 풀 길이 막막한 만성적인 화 때문에 결국 원치 않게 한국사회에 편적인 화병에 걸리고 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테면 어린아이의 경우 체벌을 한다던가 부부의 경우 집안 물건을 집어던진다던가  회사의 경우 대기발령이나 명예퇴직 등 인사상의 불이익을 주는 식의  처벌을 가해서 그런 부정적이고 불쾌한 경험을 하지 않으려면 겉으로라도  따르는 시늉을 내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때 을의 입장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자존감은 고이 접어 마음속에만 간직해야 하니 속이 얼마나 상하고 부글거릴지 그리 어렵지 않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런 유교 권위주의적 사회에서 그저 일방적인 명령과 지시에 시늉이나마 복종해야 하는 분위기 속에서 산다면 일의 생존전략으로 획일주의나 대중영합주의를 몸과 정신에 익혀야 할 텐데 문제는 이로 인해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인 분노와 절망감을 배출할 통로를 찾게 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너진 자존감과 꺾인 꿈을 대신 이뤄줄 법한 대상을 찾게 되는데 그 대상은 다름 아닌 자가의 자녀일 것입니다. 게다가 독재정권이 물러나고 민간 정부가 들어설 즈음부터 자녀를 한 명만 가자는 것이 추세가 되었기 때문에 외동아들이나 외동딸에게 거는 기대가 그 전보다 훨씬 높아졌고 97에 닥친 IMF 사태로 인해 한국사회가 신자유주의적 경향으로 급격히 바뀌는 바람에 정년이 예전처럼 보장되지 않아서 속된 말로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상시적인 불안에 시달리게 된 한국에서는 그 누구도 나와 우리 가족을 지켜주지 않고 이제는 한번 발을 삐끗하면 되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심한 불안 때문에 하나뿐인 자기 자녀가 그런 험한 꼴을 당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특히 엄마들의 과보호가 더욱 극성을 부게 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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