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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태진 Sep 14. 2021

선천적인 양심은 존재할까?

이기적이라는 표현과 함께 사람들이 몹시  잘못 이해하고 사용하는 개념으로 양심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자연이 인간에게 선물한 선천적인 양심과 구별해서 스키너 식 또는 행동주의적인 양심(?)을 이해하는데 물론 이 행동주의적인 양심은 양심과 완전히 별개인 것은 아니지만 양심과는 달리 외적인 보상과 처벌, 달 표현하자면  당근과 채찍에 의해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됩니다. 이런 양심은 당근과 채찍을 사용한 외부의 훈육에 의해 형성되고 강화되는데 프로이트의 이론에 기대어서 설명하자면 갓난아기 시절을 지나서 제 힘으로 자기 몸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훈육받는 것은 배변훈련입니다. 즉 더 이상 기저귀에 배변을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소변이나 대변이 마려우면 화장실의 변기를 이용해야 한다는 윤리적 훈육 말이지요. 이를 선천적인 양심과 관련해서 설명하자면 스스로 몸을 움직여 화장실에 가서 배변을 하지 않는다면 엄마를 힘들게 할 뿐만 아니라 방 안에 대소변 냄새가 나서 더럽고 싫다는 선천적인 좋다 싫다 범주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몸을 움직여서 화장실에 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에게만 아니라 다른 가족들에게도 피해를 끼치는 일이어서 옳지 않다는 윤리적 판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즉 선천적인 좋다 싫다는 범주를 통해서 윤리적인 옳다 그르다는 범주에 윤리적 내용을 포함시키게 되는 것이지요.


이와는 달리 행동주의적인 양심(?)은 옳다 그르다는 윤리적 범주에 어째서 거나 옳지 않은지에 대한 윤리적 내용을 포함시키지 않고서 그저 외부에서 당근을 주니까 또는 외부에서 채찍질을 하니까 그대로 따라 하는 행동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경우 보상과 처벌에 대한 좋다 싫다는 범주만이 작동하고 선천적인 양심의 옳다 그르다는 범주는 사용되지 않게 됩니다. 설사 외부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어째서 옳은지 또는 어째서 그른지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당사자가 그 윤리적 설명을 이해하고 납득하지 않는다면 외부의 윤리적 명령은 그저 당근을 얻고 채찍질은 피하려는 행동만을 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윤리적 감시자가 부재하는 경우나 당근이나 채찍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경우라면 이제까지 그의 행동을 조정했던 그 윤리적 명령은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심리학에서 내면화라고 부르는 심리적 기제(mechanism)에 의해서 그 윤리적 명령이 자신의 정신과 마음에 자리 잡는다면 그는 그 윤리적 명령을 옳다고 주관적으로 판단하고 외부의 당근과 채찍이 없어도 그 윤리적 명령을 지키려고 부단히 애를 쓸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 제3 자가 그런 그에게 그것이 어째서 옳으냐고 묻는다면 어쩌면 그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단 한마디도 말을 할 수 없게 되거나 성경이나 불경 또는 도덕교과서 같은 그 윤리적 명령이 담겨 있는 준거를 제시하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즉 „성경에 따르면 “ 또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 또는 „사회윤리적으로 볼 때“ 등의 윤리적 준거 말이지요. 그런데 만약 종교가 다르거나 없는 사람에게 이런 윤리적 설명을 한다면 과연 그런 제삼자가 이런 윤리적 근거를 이해하고 수긍할 수 있을까요?


저는 대학교 1학년 말에 다니던 토론 동아리에서 어느 겨울날 윤리에 대한 토론을 한 적이 있습니다. 토요일 오후 3시면 시작하던 그 토론 동아리에서 저의 의견을 말하기 위해 그전에 윤리란 무엇일까, 윤리란 선천적으로 본질적인 것일까 아니면 그저 사회로부터 학습된 윤리적 명령, 그것도 지배세력이 사람들을 길들이기 위해서나 어른들이 아이들을 길들이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윤리적 명령일까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중고등학생일 때 자유나 평등 같은 추상적 개념들을 외우기만 했을 뿐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드물었던 저는 윤리나 도덕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거나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윤리나 도덕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윤리적 명령이나 기준이라는 막연한 생각밖에 말이지요. 그런데 갑자기 어렸을 때 보았던 영화 속 모세의 십계명 중에서 „살인하지 말라 “는 윤리적 명령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저는 무릎을 치면서 이 윤리적 명령이야말로 아무도 반박할 수 없는 선천적인 성질의 것이다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지만 그 당시에는 외부에서 달콤한 당근을 주거나 모진 채찍질을 해댄다고 해도 그 어느 누구도 마음이 아무렇지 않은 상태에서 타인을 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윤리적 명령들, 이를테면 제가 어린아이 때부터 대학생이 되기까지 부모님, 선생님, 영화나 드라마 속에 은밀히 숨어있는 윤리적 교훈들 같은 경로들을 통해서 배운 수많은 윤리적 명령들이 살인 금지처럼 선천적인 윤리로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의 눈으로 보면 은밀할 뿐만 아니라 교묘하고 때로는 요사스럽기까지 한 그 당시 어떤 윤리적 명령들에 대해 명확한 판단을 내리기에는 그 당시 저는 너무도 경험이 부족하고 어렸습니다. 다만 살인과는 달리 뭔가 석연치 않다는 아주 찝찝한 느낌, 그러니까 어떤 윤리적 명령들은 옳아서가 아니라 어른들이 자기들 편하자고 만들어낸, 윤리라는 범주에 마땅히 포함시킬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만 들었을 뿐 더 이상 그에 대한 생각을 이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선천적인 양을,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씨앗으로서의 양심을 인어공주라는 동화에 대한 일화로 재차 확인한 적이 았는데 그 계기는  20대 때부터 거듭된 인간에 대한 실망과 절망감이 극에 달했던 30 대 후반 어느 날 저는 저를 포함한 인간에 대한 희망을 그만 놓고 싶다는 끔찍한 절망감을 느꼈을 때였습니다. 인간을 멋지게 포장해서 현실의 고단함과 인간에 대한 짙은 실망감을 잊게 하면서 흐뭇한 미소를 잠시 짓게 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더라도 그 영화나 드라마에서 묘사된 인물의 성격이나 특징이 더 이상 현실일 수 없다는 절망감 때문에 말이지요. 그리고 독일에서 유학할 때 다음 달 생계비가 없어서 심한 불안감 속에서 간신히 구한 아르바이트 일자리인 공사장 인부를 함께 했던 어느 아랍의 젊은이에게 보였던 호의가 배신으로 돌아온 경험이 인간에 대한 절망감을 더욱 굳게 했는데 그건 별 것도 아니라 힘든 공사장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목이 몹시 말라서 근처 맥 도날드에 가서 시원한 콜라 한잔을 사서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니 그도 목이 많이 마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제 것과 함께 그를 위한 콜라 한잔을 사서 건네주었는데 그다음 날 콜라를 다시 자기 것까지 사 오라는 적반하장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끼면서 저는 헛되고 시간낭비일 뿐만 아니라 소용도 없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버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희망을 버린다는 것은 당연히 인간인 저에 대한 희망도 포기함을 뜻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니 엄마 뱃속에서 태아로 존재할 때부터 유전자 속에 인간에 대한 아무런 희망을 품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악한 성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사회적인 환경과 선천적인 이기주의가 서로 영향을 끼쳐서 점점 더 타락하게 되는 것일까라는 생각 말이지요. 그러자 갑자기 제 머릿속에 오래전 어느 신문 기사에서 읽었던, 동화 인어공주와 관련된 기억이 떠올랐는데 그건 다름이 아니라 아주 어린아이가 인어공주 동화를 끝까지 읽고서 인어공주가 사랑한, 아무런 잘못도 없는 왕자를 칼로 찔러 죽이느니 차라리 내가 물거품이 되어 버리자는 동화의 결말에 엄마에게 자기 가슴을 가리키면서 „엄마, 여기가 너무 아파 “라고 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기억 때문에 저는 이 나이가 되기까지 인간에 대한 여린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주 어릴 때부터 출세와 성공을 위해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무한경쟁을 사실상 강요당하는 자본주의 사회라는 환경이 바뀐다고 인간이 영화에서나 접할 수 있는 천사로 바뀔 것이라는 기대는 전혀 하지 않습니다. 다만 어느 오래된,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한 영화 속 대사인 „우리, 인간은 되지 못해도 괴물은 되지 말자 “는 정도보다 조금 더 인간에 대한 여린 희망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아주 철딱서니 없는 말로 비칠진 모르지만 인간이 자연이 생존을 위해서 선물한 이기주의와 더불어 다른 인간들과 함께 되도록이면 갈등이나 반목을 일삼지 말고 살아갈 수 있도록 선물한 관심과 이해와 공감 그리고 협력하는 능력을 조화시키려고 애쓰면서 서로 상반되어 보이지만 긴장된 길항적 관계를 맺고 있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라는 두 가지 인간적 성질을 파괴하거나 버리지 않는 그런 인간적인, 즉 사람 냄새나는 사회를 여전히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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