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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태진 Sep 14. 2021

그  어렵고 따분한 공부를 아이들은 왜 하는 걸까?

7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닌 분들 중에는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라는 후렴구가 들어있는 <행복의 나라>라는 노래를 만들고 직접 부른 가수 한대수를 기억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거친 목소리로 난해한 멜로디의 노래를 주로 불러서 그의 곡들을 대체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가 만들고 부른 노래 중에 <멸망의 밤>이라는 노래는 멜로디가 비교적 온순하고 노랫말이 거칠긴 하지만 듣고 있노라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어서 좋아하는 곡입니다. 그런데 그 노래의 노랫말 중에는 "돈 쫓아가다 어른들은 다 지쳐버렸고 어린아이들은 다 미쳐버렸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제가 아주 젊은 20대에 이 노래 가사를 접했다면 너무 과장된 가사로 여겨져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겠지만 지금껏 살아보니 그 노래 가사가 슬프고 기막히도록 비참하고 어이없는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제가 오랜 저의 지적 스승이라고 말하곤 하는, <사랑의 기술>이란 책으로 유명한 에리히 프롬은 <건전한 사회>라는 책도 었는데 "건전한"이라는 한국 번역어의 원래 영어 단어는 "정신적으로 병들지 않은" 또는 "건강한 마음을 가진"을 뜻하는 sane입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그는 그 책에서  이른바 "집단적 정신질환"을 언급하면서 한 사회가 집단적으로 정신적인 문제를 공유할 때 그 사회 속에서 공유된 정신질환은 집단적 착시현상 때문에 정상으로 취급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한 사회가 어떤 집단적 정신질환을 공유해서 그것이 마치 정상인 양 여겨져도 한 가지 중요한 척도로 그 사회의 공유된 정신질환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처한 현실이 사람의 삶과 성장을 촉진하는 편인가 아니면 죽지 못해 산다는 표현처럼 삶과 성장을 방해하는가 여부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려 노력하는가 아니면 혼란스러운 대중의 여론에 따라 마치 옷을 번갈아 바꿔 입는 듯한 개성 없는 좀비처럼 생명력 없이 사는가 여부입니다.


나라마다 그 색깔과 명암이 다소 또는 꽤나 다르긴 하지만 우리는 모두 자본주의라는, 또는 사실상 자본주의적인  환경 조건에서 살아갑니다. 서구보다는 늦었지만 한국도 신분질서가 외세에 의해 무너진 뒤 사회적 신분은 그가 얼마나 많은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는가로 가늠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한국인의 집단적 의식이 여전히 봉건사회 질서, 즉 나와 네가 다르다는 수평적 차이가 아니라 내가 너보다 열등한지 아니면 나은지를 구별지어 차별하려는 집단적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듯합니다. 그리고 그런 차별의 잣대는 성별이나 나이차 같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거의 절대적인 차별의 근거는 나보다 사회적이거나 경제적으로 우월한지 아닌지인 나보다 사회 경제적으로 우월하지 못하다면 반말은 예사고 폭언과 폭행을 불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의 이면에는 내가 상대방을 막 대해도 내게 돌아올 불이익이 없다는 천박하기 짝이 없는 정신상태(mentality)입니다.


이런 사회 상황 속에서 억울하고 원통하지만 딱히 하소연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지 않으려면 눈에 불을 켜고 분상승과 그에 따른 넉넉한 경제적 보상을 얻기 위해 공부에 매진해야 하는데 제가 중고등학생일 때도 살벌한 입시경쟁과 취업경쟁이 있었지만 지금은 경쟁이라는 단어보다 입시지옥 취업 지옥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을 정도로 아이들은 과로에 맞먹는, 아니 그보다 더 혹심한 상황에 내몰리있는 게 현실입니다. 그러니 이런 가혹하고 잔인한 상황에 장기간 노출된 아이들의 정신이. 온전할 거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세상을 모르는 철없는 낙관론자이거나 불편한 현실에서 눈을 돌리기만 하는 현실 도피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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