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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태진 Sep 15. 2021

자본주의, 경쟁  그리고 그 너머는?

제가 살고 있는 집 가까이에는 작은 편의점 하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바깥에는 나무로 된 작은 탁자와 의자도 있어서 해가 지고 어둑한 시간에 그 나무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기도 합니다. 그 편의점이 있는 상가빌딩에는 이런저런 학원들이 있어서 늦은 저녁시간에 나가면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사서 저녁을 때우는 청소년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 아이들이 후루룩 소리를 내면서 컵라면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먼 과거로 돌아간 듯이 내가 저 나이 때는 라디오로 "밤을 잊은 그대에게""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으면서 숙제를 하거나 입시용 연습문제 풀이집으로 공부를 했는데 하는 기억이 떠 올랐고 그 기억은 이제는 이른바 추억의 팝송이 된 오래전 노래들의 아련한 노랫가락을 덩달아 떠 오르게 했습니다.


사람을 등급으로 나눈다는 표현을 들으시면 왠지 모르게 불쾌한 감정이 생기고 거부감마저 들 것입니다. 아마도 그건 사람들을 소 돼지고기의 부위를 나누어 팔듯이 인간도 그렇 나누어 놓는 듯한 불쾌한 느낌 때문일 텐데 학생들을 상대 평가에 의한 내신등급으로 나누어 놓아서 성취감은커녕 피 말리는 끝없는 경쟁으로 내모는 바람에 협력과 연대감은 고사하고 내가 성공하기 위해선 내 옆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자들도 짓밟아야 한다는 만성적인 강박관념을 뼛속 깊이 새기도록 하는 공고한 경쟁지상주의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 체재에 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제가 요즘 읽고 있는 책에는 "성채"라는 표현이 있는데 그 단어가 주는 느낌은 철벽 같이 공고하고 견고해서 무너뜨리거나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채라는 단어는 오래전 성립되어 단단히 굳어진 관행이나 관습 같은 사회구조를 비유해 일컫는 데도 쓰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내가 그런다고 사회구조가 바뀌겠어?" 하며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내가 이 사회구조에 맞지 않게 살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하며 심한 불안감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인간의 기대 수명이 예전보다 길어지긴 했지만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지구 상에 나타난 이후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합친 시간과 비교하면 마치 하루살이 같은 시간 동안만 삶을 영위하는 느낌도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세상은 별로 또는 거의 변화하지 않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오랜 역사를 되돌아보면 돌을 깨거나 갈아서 사냥에 사용했던 시기부터 우연한 계기로 발견한 농업의 기술 때문에 한 곳에 정착이 가능했던 원시사회가 생산물의 평등하지 않은 분배와 그로 인한 축적을 바탕으로 무리의 위계와 질서가 형성되었고 그런 사회적 경제적 위계의 대물림을 바탕으로 영주나 왕이 등장하게 된 봉건사회로 이어졌으며 자연과학의 급속한 발달과 그 바탕 위에서 기계의 발달로 인한 상업의 급속한 팽창 그리고 보편적 존재로서의 인간 존재에 눈을 뜨게 된 신적인 인문시회적 사상들로 인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처럼 인간이 사는 세상은 계속 사회경제적인 모순을 파괴하거나 새로운 사회경제적 모순들을 태동시키면서 계속 변화해 왔습니다.


그래서 500년 동안이나 유교 질서에 기반해 공고히 존재했던 조선 왕조시대가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어처구니없고 말도 안 되는 사회이듯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람 피를 말리는 끝없는 경쟁을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 사회도 봉착한 위기와 드러난 모순에 대해 고민하는 혁신적 정신과 태도, 그리고 이와 맞물린 기술의 혁신적 변화로 인해 새롭고 진일보한 사회로 이행하면 조선 왕조시대처럼 어처구니없는 사회로 보이게 될지 모릅니다. 물론 지금도 해결하진 못했지만 현재의 시각으로 볼 때도  이미 드러난 어처구니없는 사회경제적 그리고 문화적인 모순들도 있지만 중요한 점은 그 모순들을 없애야 한다는 당위적인 가치와 함께 "어떻게"하면 그 모순들을 없앨 수 있을까 하는 가능성의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때 조심해야 할 점은 도 아니면 모다라는 식의 이분법적 판단인데 다시 말씀드려서 완벽한 해결책이 아니라 성에 차지 않더라도 조금씩 차근차근 그 모순들을 줄여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앞에 놓인 미래는 마치 짙은 안갯속에 쌓인 듯 좀처럼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그래서 뚜렷한 인식의 한계를 가진 인이 정확히 앞을 내다볼 수 없기 때문에  선택한 방법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미처 생각지 못한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모순을 어떤 식으로든 조금 줄였을 때 지금의 시각으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가능성이 펼쳐지는 사회의 모습을 마치 우연처럼 마주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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