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울증, 극도의 흥분과 극도의 절망 사이 (3)
코로나가 돌기 전 어느 날 저는 사이코 드라마를 보기 위해서 중곡동에 있는 정신병원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긴장을 푼 뒤 그날의 주인공을 선정했는데 네다섯 분의 후보자 가운데 거수로 나이가 꽤나 지긋하신 남자 환자가 선정되었습니다. 극이 진행되면서 그분이 무슨 이유로 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되었는지 점점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는데 극 말미에 그분은 간절한 표정과 말투로 사이가 안 좋아진 아들과 함께 술 한잔을 나누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극이 마무리되고 관객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덕담 수준의 말을 하는 시간이 되었고 저는 손을 든 뒤 그분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서 좋아지셔서 아드님과 술 한잔 나누셔야지요'라고 말이지요.
"실존은 존재보다 앞선다"는 난해한 말을 남긴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유명한 말도 남겼는데 "지금 처해진 상황이나 처지"를 의미하는 실존적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인 인간은 실존적으로 당면한 문제 앞에서 때론 고민도 하고 갈등도 하고 피하고도 싶고 다 부숴버려서 무너뜨리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그 너머 어떤 흐뭇하고 좋은 미래를 상상하면서 말이지요. 문제는 내가 처해서 살고 있는 세상에는 나 말고도 나와 취향이나 관심도 다를뿐더러 세계관이나 가치관이 사뭇 다른 타인들도 같이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내가 소중히 여기면서 지향하는 바와 그들 중에 어떤 이가 지향하는 바가 다를 수 있고 때로는 그로 인해 마찰과 충돌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곤란한 점은 내가 지향하는 바를 철석같이 옳은 것으로 여기듯이 타인도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철석같이 옳은 것으로 믿는다는 점입니다. 물론 뒤통수를 때리는 것과 같은 배신이나 자기의 이득을 위해서 남을 이용해 먹는 것 때문에 타인이 지옥일 수도 있지만 나의 주관적 가치의 실현이 타인의 다른 주관적 가치로 인해 가로막히고 그에 대한 토론장에서도 서로 얼굴을 붉혀가면서 갑론을박해 봐도 좀처럼 그 간격이 좁혀지지 않을 때 인간에 절망하면서 타인을 지옥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날 사이코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뽑혀서 즉흥극의 주인공이 된 나이 지긋한 아저씨도 타인인 아들과의 불화로 고통받고 있었는데 거꾸로 그 아들도 아버지 때문에 심한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갑자기 뜬금없는 얘기지만 젊은 시절 어느 일간지에 정기적으로 실린 네 컷 짜리 만화를 보곤 했는데 어느 날 그 만화에는 "부부란 같은 곳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존재이다""라는 교훈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서로 다른 존재인 부부가 의견 차이로 인해 벌어질 수 있는 갈등이나 다툼이 없겠다는 막연한 상상 때문에 얼핏 흐뭇한 느낌을 줄 수 있는데 문제는 "같은 지향점"을 누가 정해서 어떻게 합의하느냐라는 것과 함께 사람이 살면서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 문제나 곤경에 맞닥뜨리게 되는데 어떻게 그때마다 같은 의견으로 같은 해결 방식을 구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방과 의견이나 가치관 또는 세계관이 동일하다면 어떤 경우에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아이디어를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해 낼 수 있는가, 그래서 더 나은 상태를 현실화시킬 수 있는가라는 의문도 낳게 됩니다.
타인이란 단어는 사람이란 뜻과 함께."다르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때 무엇이 다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데 우선 성별, 나이, 인종, 국적 등 집단적인 차원에서도 다르지만 좋아한다 싫어한다는 개인적 차원에서도 다릅니다. 물론 그 개인적 다름이 영 딴판인 경우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 같으면서도 어떤 점들에서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적 인간이라는 차원에서 이 호불호가 윤리의 바탕이 되기도 하지만 개인적일 뿐인 호불호를 타인인 상대방에게 사실상 강요할 때 타인과의 마찰이나 불화가 생길 것입니다. 문제는 상대적으로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을에게 자신의 취향과 관심을 윤리적인 뉘앙스로 강요할 때 을은 그 갑인 타인으로 인해 때론 지옥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교훈적인 어투로 말하는 사람조차도 때로는 갑작스러운 기술적 장애 때문에 정지된 화면처럼 그가 교훈적으로 말하는 내용이 너무 추상적이어서 자기의 주장을 눈앞에 제대로 그리지 못할 수 있고 설사 영화의 마지막 해피엔딩 장면처럼 흐릿하게나마 흐뭇한 상상을 하더라도 그 장면이 끝나고 어두운 극장의 불이 밝혀져서 극장 문을 나서게 되면 말싸움하면서 지나가는 사람들, 출출한 속을 채우기 위해 무엇을 먹을까를 같이 영화를 본 사람과 의논하다가 좀처럼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는 것 그리고 식사를 맛있게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어느 부분에서 예상치 못한 의견 불일치로 갑자기 분위기가 좀 썰렁해지는 것과 같이 예측이 어느 정도 가능하거나 예측하기 힘든 살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고 그저 정지된 흐뭇한 상상이 현실에서 지속되기를 바라는 비현실적인 흐뭇한, 그러나 막연한 상상을 고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제거 그날의 사이코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던 아저씨에게 "아드님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어떤 말씀을 들려주고 싶으신가요? 그리고 그 말씀에 아드님은 어떻게 반응할 것 같으신가요?"라고 물었다면 그 아저씨는 어떤 답변을 내놓았을까요?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