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울증, 극도의 흥분과 극도의 절망 사이 (4)
그 누구도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을 마다하거나 거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냐고 묻는다면 어쩌면 이렇게 답할지도 모릅니다. 즉 가족의 건강과 넉넉한 재물의 획득 같이 귀에 익숙한 소망 등을 말이지요. 물론 가족이 건강하게 산다는 것은 다행스럽고 좋은 것이고 넉넉한 재물을 획득하는 것 또한 윤택한 삶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 소원이 전부인지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가능할까요? 어떤 사람은 자기 자녀가 반에서 1,2 등을 다툴 정도로 공부를 잘해서 이른바 SKY 대학에 들아가고 졸업하면 행정고시 등에 합격해서 보수도 좋고 안전성도 좋은 고위 공무원이 되거나 대기업에 들어가서 좋은 배경의 배우자를 만나 "행복하게" 사는 것을 바란다라고 대답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전월세 신세에서 벗어나서 남들 부럽지 않은 크기의 집을 장만하는 것이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런 조건을 충족시킨 사람에게 어째서 삶이 여전히 행복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어쩌면 껄끄럽고 피곤한 인간관계 때문이라고 답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인간관계가 왜 그토록 껄끄럽고 피곤하냐고 다시 묻는다면 그는 어떤 답을 내놓을까요? 아마도 그는 그 상대방이 나에 대해 험담하고 나에게 모욕을 주었고 나에게 부당한 말이나 행동을 해서 또는 내 의견을 묵살하고 자기 맘대로 결정했기 때문에, 그리고 나와 다른 주장을 고집해서 말의 씨알도 먹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의 그런 대답을 듣고 나서 그럼 어떻게 하면 그런 그와 행복하게 잘 지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한다면 그는 나를 신뢰하고 나에 대한 객관적이고 긍정적인 판단을 내리고 무엇보다도 나의 의견이나 주장에 귀 기울여서 나를 잘 이해하고 공감한다면 좋겠다는 답을 내놓을지 모릅니다.
마케팅의 중요한 분석 방법 중에 현 상태 및 바람직한 상태 (is / to be) 비교 분석 기법이 있습니다. 이 분석 방법은 굳이 마케팅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닌데 우리는 살아가면서 더 나은 처지로 바꾸려면, 즉 지금과 비교해서 행복해지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는 식의 생각과 판단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살아가면서 문제에 부딪혀 그로 인한 고민이나 갈등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을 텐데 또한 그 누구도 자신이 처한 현실 속의 심각한 문제를 가볍게 여기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순 없습니다. 그래서 불편하고 속상하고 피곤하고 힘겨운 그 문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이리저리 찾아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문제가 심각하거나 복잡할 때는 마치 빠져나갈 통로를 가늠하기 몹시 힘든 미로에 빠진 듯한 느낌 때문에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막막해져서 조급해지고 그 결과로 현실적인 방법보다는 흐뭇하고 편안한 상상 속의 해결책(?)을 생각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흐뭇한 공상 속 장면에는 현실 속의 특정한 인간, 그러니까 나와 대립각을 세우고 내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구체적인 타인의 모습이 아니라 "그가 이랬으면, 저랬으면"하면서 그런 공상 속 인물로 그 타인을 허구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상 속에서 자신의 변화된 모습도 상상할 수 있을 텐데 상상 속의 자신의 모습은 있는 그대로의 또는 잠재된 성질에 기반한 모습으로서의 자기가 아니라 신파조의 드라마나 영화 속의 허구적 인물을 본뜬 모습일 경우가 태반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습은 구불구불한 변화를 동반하는 긴 삶의 여정 속에서 이런저런 상황과 맞닥뜨려서 발생하는 슬픔, 기쁨, 즐거움 그리고 분노 같은 여러 감정과 그런 감정들에 실린 개인의 욕구를 담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 영화의 마지막 해피엔딩 장면이 10분 정도 정지되고 그 정지된 장면에 10분 동안 눈을 떼지 않고서 바라본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요? 어쩌면 그 시선은 정지된 화면 속의 주인공에게 향할 텐데 제 짐작이지만 그렇게 고정된 시선은 자꾸만 옆을 둘러보거나 아예 화면에서 눈을 떼고 싶어 질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억지로 정지된 화면 속 주인공에게 시선을 집중하려고 하면 옛날 식으로 말해서 마치 지붕에 설치해 놓은 티브이 안테나가 강한 바람 때문에 제 위치를 벗어났기 때문에 티브이 화면이 또렷하지 못하게 되는 것처럼 또렷하게 보아던 주인공의 행복한 얼굴 표정이 흐릿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주인공의 행복한 표정이 흐뭇하고 가슴 찡한 느낌을 더 이상 불러일으키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건 마치 자신이 무척 좋아하는 대가의 그림 앞에서 그 그림을 넋을 잃고 바라보며 잠시 머물다가 다른 그림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과 그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제 고통은 끝나고 행복하기만을 바라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상태를 상상해 보려고 한다면 자꾸만 정지된 어떤 장면만 떠오르곤 할 것입니다. 그 정지된 장면 속의 행복함도 그 장면과 단단히 묶여 있는데 그 누구도 그런 행복한 장면이 구체적인 삶 속에서 계속 유지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상상으로 잠시 행복했던 "순간"을 기억하거나 희망할 뿐 말이지요. 그런데 만약 그 "행복했던"순간을 또는 "어쩌면 행복할지도 모르는 순간"을 아침에 잠이 깨어 씻고 밥을 먹고 출근하거나 등교하거나 집안일을 시작하다가 다시 배가 출출해져서 밥을 먹고 지루한 수업을 듣거나 천편 일룰적인 업무를 보거나 햇볕이 좋아서 생각보다 빨리 마른 옷이나 수건을 개키기도 하는 평범한 일상 속의 한 순간으로 생각해 본다면 어쩌면 좀 섭섭할진 몰라도 그 행복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서 생기는 조바심이나 초조함은 사라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우라가 아침에 깨어서 밤에 잠들기까지의 일상의 삶 속에서 마주치는 순간으로 상상해 본다면 말이지요.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오래전 젊을 때 읽고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 제목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저도 오래전 경험했고 그 짧지 않은 고통스러웠던 경험 때문에 마음속에 가지게 된 생각인데 개인적인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고통스러운 결핍이 심하고 게다가 짧지 않을 뿐만 아니러 그 고통이 언제 끝날지 몰라서 고통스러운 긴장과 두려움이 지속될 때 극단적인 반대편의 행복한 상태를 간절히 원하게도 된다는 생각 말이지요. 그건 고통스러움과 끝이 보이지 않는 공포 때문에 시야가 좁아져서 좀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과 공포를 완전히 없앨 수만 있다면 악마와 계약을 맺고 내 영혼을 팔 수도 있다는 마음이 간절히 들 정도까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건 상상일 뿐이지만 그로 인해 나타나게 될, 두려움을 넘어 끔찍한 고통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채 말입니다. 그런데 좁아진 시야 너머에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성을 지닌 인간"이라는 존재를 희생해야 하는 치명적인 대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건 비록 때로는 겁이 나서 나서지는 못하지만 억울한 처지에 놓인 사람 때문에 쓸쓸한 슬픔을 느끼면서 거대한 벽처럼 느껴지는 갑, 즉 부당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저질러 놓고도 안색이 변하기는커녕 흐뭇한 웃음을 짓는, 인간으로 불릴 자격이 없는 괴물 같은 인간에게 화가 치밀어 오르는 인간성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말이지만 조울증의 증상도 이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현실 속에서 포착되지 않고 그 존재의 근거도 찾을 길이 없는 아주 막연한 흐뭇한 공상 속에 빠져서 극도로 흥분된 상태가 되었다가 어쩔 수 없이 마주쳐야 하는 일상의 누추함이나 변변치 못한 구체적인 삶으로 인해 때론 간절히 바라는 자신의 소망의 충족 가능성을 현실 속에서 찾을 수 없어서 마음이 다시 캄캄하고 우울해지고 그래서 세상이 온통 캄캄하게 보이기만 하는 극도의 절망 상태를 번갈아 가며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극단적인 상태의 변화는 악순환에 빠질 위험이 있는데 그 이유는 공상 속에만 존재하는 극단적이자 영속적인 막연한 행복한 상태를 상상하는 사람의 눈에는 현실 세계가 못마땅함을 넘어서 지옥으로까지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