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울증, 극도의 흥분과 극도의 절망 사이 (5)

by 조태진

앞선 글에서 행복이라는 아주 추상적인 단어를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나는 이럴 때 행복해"라는 표현 속의 "이럴 때"를 비어 있는 괄호로 상상한 뒤 그 괄호를 채워 넣는다면 행복이란 추상적인 개념 속에 구체적인 현실을 어느 정도 담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와 함께 "나는 이렇게 된다면 행복할 텐데"라는 표현에도 적용해 보면 불확실한 미래의 모습을 어느 정도 눈앞에 그리게 되고 그에 따라서 동기 유발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행복을 정서적으로 설명해 본다면 "행복해서 가슴이 뛴다"던가 어쩌면 미래에 찾아올지 모르는 행복 때문에 "가슴이 설렌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말이지만 꽤나 오래전 지금은 퇴직했지만 중학교 시절부터 친한 친구가 산업은행 임원으로 잘 나갈 때 그의 직장 근처에서 술 한잔을 같이 했습니다. 역시 중학교 때 친구였지만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다시 소식을 알게 된 다른 친구가 오기 전에 첫술 잔에 소주를 따라 마신 뒤 그 친구는 뜬금없이 이럴게 물었습니다. "너는 행복하니?"라고 말이지요. 그 잘문을 받고 저는 아주 잠시 생각해 보다가 그에게 "응, 문득문득"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는데 제 예상과는 달리 그는 곧바로 "전혀"라고 답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그의 대답을 듣고서 그리 놀라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의 소식을 오랫동안 모르다가, 그러니까 중학교를 졸업하고 소식이 끊겼다가 대학생이 되어서 다시 만나게 된 뒤 그와 함께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를 하가 잠시 휴게실에서 담배를 피우며 자판기 커피를 마시거나 또는 저녁 늦게 술집에서 술을 마시면서 종종 기를 나누어서 그의 삶과 그의 가치관 등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전에 어느 철학서적에서 "형용 모순"이라는 표현을 접한 적이 있는데 이를테면 " 재미없게 본 흥미진진한 영화"라든가 "즐거운 지옥" 같은 표현이 형용모순적일 것입니다. 그런데 청춘기를 지나 중년의 초입에 다다를 나이가 되니 인간의 삶이 교과서에 쓰여 있는 대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상황에 반응하는 마음의 결도 한 가지 색이 아님을 막연히 깨닫게 되었는데 그중에는 제가 지금도 이따금 입에 올리는 "편안한 쓸쓸함"도 있습니다. 이 느낌을 전달해 보기 위해서 풀어 말하자면 언젠가 늦은 밤 순댓국 집에서 혼자 간단히 술을 마셨는데 소주 한 병을 거의 다 비울 즈음에 기분 좋은 취기가 느껴졌고 지갑을 꺼내 술값을 치른 뒤 이미 어둠이 깊이 깔린 밖으로 나오자 빠른 속도로 차도를 지나가는 자동차들 뒤로 어둠 속에서 제 윤곽만 간신히 드러낸 가로수들을 보자 기분 좋은 취기와 함께 여린 슬픔이 번져왔습니다. 그리고 제 입에선 "세상이 이렇게 고운데 그 고운 세상에 사는 우리 인간들의 삶은... "이라는 말이 또렷하지 않은 채 새어 나왔고 저는 그 감정에 "슬프도록 고운"이라는 표현을 붙였습니.



요새는 대형서점에서 베스트셀러에 속하기는커녕 대부분 오래전 절판된 책들을 쓴 미국의 실존주의적 정신분석학자인 롤로 메이가 쓴 느 책 속에는 즐거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었는데 그 부분을 읽고 나서 저는 제가 느꼈던 즐거운 감정을 되돌아보았고 그러자 마치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던, 또는 눈여겨보지 못했던 이름도 모르는 작은 곤충이 살아 숨 쉬면서 제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에 탄성이 절로 나오는 것처럼 "이런 느낌도 즐거움에 속하는구나"하는 자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즐거움에 "행복"이라는 단어를 넣어 보려고 하니 그동안의 선입견 때문인지 영 어울리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행복이라는 단어 앞에 "조용한"이나 "소소한" 이란 표현을 덧붙이니 그제야 제 마음이 고개를 끄덕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때 제가 느낀, 또는 가슴으로 깨달은 "조용한 또는 소소한 행복"의 느낌을 보다 잘 전달하기 위해서 대학생일 때 즐겨 읽던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라는 시의 전문을 옮깁니다.


<즐거운 편지>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끝)


저는 이 시의 내용 중에서 "내 그대를 생각함은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바람이 불고 해가 지는 것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메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온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라는 시구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좀 뜬금없는 얘기지만 "사랑"이라고 하면 그 감정이 엄청난 성질의 것 인양 느껴지기도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아빠가 호떡 사 왔다, 호떡 먹자" 하는 것 같은 분위기의 사소한, 또는 소소한 사랑을 마음으로 온전히 느낄 수 있습니다. 또는 휴일 날 가족과 함께 오래간만에 외식을 하기로 했는데 먹고 싶은 음식을 미리 점찍어 놓기는 했지만 아내가 고른 음식이 탐탁지는 않아도 그래도 먹을만하다면 미리 점찍어놓은 음식이 없는 양 " 그래, 그게 좋겠다"라고 하면서 슬쩍 아내에게 양보하는 미덕(?)도 소소한 사랑이지만 구체적인 사랑으로, 다시 말해서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랑이라고 가슴으로. 느낍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무척이나 존경하는 마더 테레사의 선행이 사랑이 아나라고 말하려는 건 아나지만 저는 어떤 사람이 마더 테레사에게 당신이 실천한 사랑을 본받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녀가 "우선 자기 가족들부터 돌보세요"라고 한 말에 주목합니다. 어쩌면, 아니 아마도 그녀는 그녀가 사회적 약자들에게 보여 준 사랑이 얼마나 힘들고 고된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생생히 기억하고 있어서 그런 말을 했을 텐데 그에 대해 제 생각을 덧붙이자면 세계 평화를 이루거나 아프리카의 난민들의 처지를 개선해야 한다는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동참할 엄두가 나지 않더라도 찬구와 술을 마시고 있는데 술집에 들어와서 가난하고 열악한 처지의 노인들을 돕고자 하니 도와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지갑에서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이것만 드릴게요" 하며 천 원을 건네는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장면을 우연히 지켜보던 어느 사람이 "에계, 고작 천 원? 그걸로는 편의점에서 컵라면 하나 사서 먹기에도 부족한데"하며 속으로 비웃어도 어쩔 수 없지만 말입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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