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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태진 Dec 24. 2021

중독, 순간적 짜릿함과 끝 모를 불안 (3)

몇 해 전 저는 디즈니사가 만든 만화영화인 "모아나"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들 눈에는 그저 한 부족의 장의 딸인 모아나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돛단배 한 척을 타고 씩씩하게 망망대해로 가면서 이런저런 역경을 극복하고 마지막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화로 보이겠지만 정신분석학을 공부한 제 눈에는 만화영화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들과 그 캐릭터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등이 거의 모두 이야기 속에 꽁꽁 숨겨둔 상징으로 읽혔습니다. 갑자기 뜬금없는 말로 비칠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 만화영화를 보면서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속하는 마르쿠제가 지은 "일차원적 인간"이란 책 제목을 떠올렸는데 그 이유는  영화 속에 마대로 변신이 가능한 반신(半神)적인 존재로 나오는 마우이가 제 눈에는 인간 오성, 즉 지능으로 보였고 마르쿠제는 그 책 속에서 현대인이 합리적 이성의 존재는 소홀히 하면서 삶의 가치나 의미 따위에는 눈길을 잘 주지 않은 채 오직 지능을 사용해서 "어떻게" 하면 무엇을, 전형적인 예를 들면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소유할 수 있는가에만 골몰하는 정신병리적 상을 나타내고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화 마지막 즈음에 나타나는, 자신의 심장을 빼앗긴 채 활활 타오르는 불로 묘사된 광란하는 테 피티는 위 지능을 사용한 과학이라는  수단으로 분석하고 조작하려는 인간의 "자연성", 즉 선천적인 인간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지능으로는 온전히 밝힐 수 없고 단지 느낌으로서만 이해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인간성 말이지요. 건 지능을 상징하는 마우이가 변신술을 통해 테 피티를 어떻게 해 보려고 해도 모두 실패했지만 모아나가 바다의 힘을 빌려 테 피티에게 다가가서 테 피티의 빼앗긴 장을 되돌려주고 나서 얼굴을 만지며 "나 너 알아"했을 때 광란하던 테 피티의 몸을 감싸며 타오르던 불길이 지고 아주 잠시 화석처럼 변다가 이내 푸른 잎들로 된 모아나의 모습으로 바뀐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절대로 조작하거나 제멋대로 바꿀 수 없는 자연으로서의 인간의 마음을 가리키면서 말이지요. 사족이지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성, 즉 도구적 이성이 나쁜 것 아니고 영화 속에서도 악마적인 존재로 그려지지 않지만 저는 그 만화영화를 보면서 인간의 지능의 절대적인 한계와 함께 도구적 이성을 그저 자기 자신의 일부분이 아니라 숭배의 대상이나 윤리적 이성과 적대하면서 오로지 돈과 권력을 거머쥐려는 수단으로써만 사용하려 들 때 인간의 "마음"이 점점 어떻게 병들 수 있는지, 그래서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간곡하게 "그렇게 하면 끔찍한 고통에 빠진다"라는 메시지를 연거푸 보내는지를 새삼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좀 엉뚱한 얘기지만 신약성경에는 "만족하는 마음을 가진 자가 행복하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표현은 일견 멋있을 뿐만 아니라 옳아 보이기도 하는데 자기가 처한 상황에 대해 불만족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 불만족이 가져오는 마음의 고통이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가 성립될 것이고 게다가 남과의 비교에 의한 시기심, 질투 그리고 그 상대적 불만족을 해소하기 위해서 저지르는 어처구니없는 의도된 잘못이나 심지어 범죄조차 없게 될 것이라는 무척이나 흐뭇해 보이는 결론도 나오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자신의 마음의 일시적 상태인 불만족감을 어떻게 맘대로 만족감의 상태로 바꿀 수 있는가라는 문제와 더불어 마음속에 일어난 불만족감이 정죄의 대상인가 하는 윤리적 문제입니다. 이때 나이 많으신 어른들은 흔히 비교의 대상을 역전시켜서 "너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뭐가 그리도 불편해서 불만족스러워하느냐"는 공자님 말씀을 늘어놓아서 본의 아니게 그리고 자산도 알아채지 못한 채 이른바 "꼰대" 대접을 받기도 합니다. 실 그분들의 말씀이 원적으로 틀리지도 않고 때로는 옆에서 볼 때 저리도 풍족하고 여유로운 경제적 처지에 있는 사람이 뭐가 부족해서 자신의 삶에 불만족스러워하지? 하는 의문을 자아내는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러나 그 말이 원칙적으로는 사실이더라도 실상 잔인한 말로서 그렇게 역으로 비교하다 보면 부당한 사회적 처우나 대접마저 용인할 위험이 있고 처해진 삶의 조건들을 개선하려는 동기를 억누르는 잔인한 폭군으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만족한다, 불만족한다는 차원과 함께 무엇을 어떤 이유로 불만족스럽게 생각하느냐라는 물음이 반드시 함께 제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현실의 열악한 조건(들)에 대해 불만족스러우면 그 열악한 현실의 조건(들)을 낫게 바꾸고자 하는 동기가 생길 수 있는데 만약 이런 동기가 요상한 논리로 가로막힌다면 "고인 물은 썩는다"는 표현처럼 사람의 삶이 원치않게 퇴폐할 수 있기 때문인데 이를 우리는 절대적 비관주의인 염세주의에 바탕을 둔 "타락"이라고도 표현합니다.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잠시 윤리적 판단을 미뤄놓고 말하자면 마음은 우리들에게 무엇이 결핍되었다는 심리적 신호를 보내기도 하는데 이때의 심리적 신호는 달갑지도 않을뿐더러 때론 몹시 불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불편한 심리적 신호를 느낀 사람들은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시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때 중요한 점은 "결핍되었다"는 강력한 신호뿐만 아니라 "무엇"이 결핍되었는가에 대한 신호입니다. 그런데 때론 이 정직한 신호가 불편하고 성가실 뿐만 아니라 인정하기 싫어서 자꾸 무시하다 보면 어느 시점에서 ~결핍되어 있다는 신호만 감지하게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정하기 싫은 것은 자신에게 결핍된 "대상"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억압하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그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어떤 상태, 즉 결핍되어 있다는 상태만큼은 억압하려 해도 억압될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건 마치 어린아이가 특정한 "무엇"인가를 먹고 싶어 하는데 "엄마가 더 맛있는 것을 사 줄게"하면서 정작 아이가 먹고 싶어 하는 것을 무시하거나 왜곡할 수는 있어도 아이가 무엇을 '먹고 싶어 한다"는 사실마저 무시하거나 왜곡할 수 없는 상황과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는 가치판단적인 이유가 무시되거나 합리화 등을 통 억압될 때 나타나는 현상과 비슷할지도 모릅니다. 설명을 돕기 위해서 독일어 표현 하나를 빌자면 Das Gewissen wird ihnen keine Ruhe gönnen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아를 직역하면 "양심은 그들에게 안식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입니다. 지금은 오래된 표현이 되어버린 "양심에 털 난 사람"이란 표현은 얼핏 자꾸만 나쁜 짓을 반복하다 보면 마음속 양심도 무뎌진다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마음속 양심은 그저 계속 경고의 신호를 보낼 뿐 행위 자체를 억지로 막을 수 있는 기능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돈과 권력을 탐하며 그를 손에 거머쥐기 위해 어떤 범죄를 저지를 생각을 하면 물론 그 범죄에 대한 외부의 처벌이 두려워서 떨릴 수도 있지만  아직 범죄를 시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 상상일 뿐인데도 몸이 불쾌하게 긴장하면서 불안해지고 떨리는 현상은 양심이 "그것은 나쁜 짓이다"라는 판단을 내리고 그 범죄행위를 저지르고자 하는 사람에게 윤리적 껑고 신호를 보내면서 필사적으로 막는 내적 반응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제 얘기에 콧방귀를 뀌면서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하는 분도 계실지 모르지만 적어도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면 속의 양심이 그 나쁜 짓을 계속하는 것에 반발하면서 나타내는 최대의 반응이 삶에서 점점 더 기쁨과 즐거움을 빼앗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예전에는 아이들 재잘거리면서 뛰노는 광경을 볼 때 흐뭇한 마음이 들거나 감상적이고 신파조의 영화를 봤을 때 잠시 조금 가슴이 젖기도 했으며 탁 트인 바닷가에 서면 묵었던 체증이 쑥 내려가면서 잠시 막연한 자유의 느낌도 받았지만 이제는 비슷한 상황에 처해도 무덤덤하거나 아예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막연한 추측이지만 그가 그토록 추구하는 돈과 권력에 노예가 되게 함으로써 행복감은커녕 "점점  많이" 하는 마음 때문에 속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하고 그가 그에 대한 도피 방법으로, 즉 불편하고 초조하고 헛헛한 마음을 잊어버리려고 섹스와 슬과 도박 등에 몰두하려고 하면 그로 인한 짜릿한 말초신경적 쾌의 정도를 자꾸 낮춤으로써 그런 피 전략이 허망하고 소용도 없음을 자각시키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국 어느새 늙어버그의 입에서는 "인생무상"이나 "살아보니 삶이 덧없더라"는 말이 나오게 하는 복수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삶을 낭비하고 모욕한 범죄에 대한 내면의 복수로 말이지요.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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