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의 대표적인 예는 알코올 중독과 도박중독입니다. 이에 대해 그런 행위가 옳지 못하다고 어렵지 않게 윤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지만 정작 그런 행동이 어째서 중독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조금 복잡할 것입니다. 우선 그런 행위가 중독성으로 변하게 되는 이유는 짐승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있는 회피 행동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어떤 행위가 중독성을 가지게 돠는 이유는 인간의 마음속에서의 내적 활동, 즉 속상하고 억울하고 분하고 어이없는 경험, 그러니까 심한 만성적인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마음속 상처로서의 기억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는 그런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대상이 자기가 감당할 수 존재여서 현실 속에서 대항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행복하게 살고 싶은 존재여서 이런 두렵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원치 않는다는 말은 너무나 뻔해서 그런 말이 바보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삶에서 원치 않게 고통과 마주치게 되는 것도 너무 뻔하고 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어떤 분이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라고 말이지요. 그날 그 말이 쓸쓸하게 들렸던 건 변하지 않는 건 하나도 없다는 말 중에 변화의 주체가 주로 사람으로 읽혔고 그 변화의 방향이 좋은 쪽보다는 안 좋은 쪽으로의 변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쓸쓸한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서 그분께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도 행복하고 싶은 욕구는 변하지 않잖아요"라는 말씀을 말이지요. 그런데 그분과 헤어지고 난 뒤 저에겐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누구나 다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행복감은 가끔 마음에 반가운 손님처럼 찾아오는데 그런 행복감만을 위해서 사는 걸까?"라는 의문 말이지요. 그러자 저에겐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삶은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거칠게 이는 파도와 같은데 어쩌면 그 파도의 거친 숨결에 정신과 몸을 맡기면서 버텨내다가 어떤 땐 한숨 돌리며 그 파도의 숨걸을 조금 떨어져서 볼 때 숨이 좀 편해지고 팽팽하게 긴장된 근육도 잠시 풀어지기도 하는데 이 잠시의 상태를 이른바 "평온한 휴식 같은 항복"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이때 휴식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앞으로 거칠어질 수 있는 삶이라는 파도에 정신과 몸을 맡겨야 하는 힘을 다시 모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뜬금없는 말이지만 제가 우연히 접한 책 중에 "긍정의 배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는 이 "배반"이라는 표현을 "역설"이라고 고쳐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역설이란 좋다고 하는 것을 계속 추구하는데 그럴수록 상황이나 연속되는 결과는 그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치 허우적거릴수록 천천히 빠져드는 기분 나쁜 음습한 늪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삶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사는가에 따라 결과는 사뭇 다르게 전개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해, 공감 그리고 배려" 같은 추상적인 가치에 반대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과연 그런 가치를 주관적으로 풀어서 행동에 옮길 때 나타날 수 있는 결과에도 눈길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마음이 불편해지실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선의에 바탕을 둔 행동에 이른바 "배신"이나 "악용" 등으로 답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젊었을 때 추상적으로 간직했던 가치들이 상처 받기를 연거푸 하다 보면 인간에 대한 실망과 좌절을 연거푸 느끼게 되어서 삶을 대하는 태도가 냉소적이 될 위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선의에 대한 배신도 악용도 있을 수 있는 일로 여기면서 삶을 대할 때, 다시 말해서 내가 원치 않게 상처 받을 수 있다는 씁쓸한 각오를 할 때 쓸쓸하긴 하지만 그래도 삶을 조심스럽게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게 들 수 있습니다. 좀 엉뚱한 예를 들자면 그건 공포영화를 보다가 예상치 못하게 갑작스레 나타난 무서운 장면 때문에 몹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다가 또 언제 무서운 장면이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예상 때문에 단단히 마음을 준비하면서 긴장된 마음으로 공포영화 화면을 똑바로 응시했을 때 안 놀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덜 놀라는 것과 많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 초등학교 동창인 어느 소설가는 자신의 어느 책 제목을 "상처 없는 영혼"이라고 지었는데 그 뜻은 아무도 살면서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을 수는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행복하기만을 바라면서 살다가 뜻하지 않게 타인으로 인해 상처를 종종 받게 된다면 그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자연스럽게 생긴 마음속 상처를 제멋대로 지워버리겠다고 고집을 피운다면 마음속 상처는 천천히 아물지 못한 채 또 원치 않게 상처를 받으면 그 상처는 곪아 버릴 수 있습니다. 저는 가끔 "삶을 버틴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 이유는 삶을 버티면서 살지 않고 살다간 결국 타락하게 될 것이라는 불길하지만 확실한 믿음 때문입니다.
앞에서 중독 현상이란 일종의 회피 행동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회피 전략은 원칙적으로 잘못된 것도 아니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건강한 본능으로서 어떤 불쾌한 자극에 대해 준비하는 성향의 일종입니다. 예를 들어서 늦은 밤길에 귀가해야 하는 젊은 여성이라면 몹쓸 봉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택시를 타고 집 앞까지 간다던가 날 것 그대로의 자기의 주장이 사람들을 자극해서 그들이 자신을 경멸하고 심하게 비난을 할까 봐 자기의 주장을 가다듬는 일종의 자기 검열 등의 행위는 건강한 회피 전략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불쾌하고 속상한 경험 때문에 생긴 그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회피한다고 상상하면 우선 "그걸 어떻게 해?" 하는 의문부터 들 것입니다. 그것도 심한 마음의 상처 때문에 강렬한 정서와 단단히 결합된 기억으로부터 말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 고통스러운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때로는 이른바 "정신을 잃어버리게" 하는 특정 행동을 하기도 하는데 그러한 행동에는 술을 잔뜩 마시기, 클럽 등에 가서 광란적으로 춤을 추기, 그리고 게임이나 도박을 하기 등이 있을 것입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인간은, 아무리 의지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도 어느 지점에서는 녹초가 되거나 탈진하게 되기도 하는 인간에게는 다시 힘을 차리기 위해서 휴식을 필요로 하는데 그 휴식이란 잠 자기, 소파에 누워서 멍한 눈으로 티브이 보기 등을 뜻하기도 하지만 자기에게 맞는,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는 놀이도 재충전을 위한 일종의 휴식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독과 휴식을 어떻게 가를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엔 마음속에 생겨버린 상처의 존재를 억지로 부정하거나 잊으려고 하지 않고 힘들지만 그 상처의 존재를 정직하게 인정하는가와 함께 "이젠 고통 끝, 행복만 가득"이라는 일견 멋지고 흐뭇한 인상을 주지만 악마는 디테일 속에 숨어 있다는 표현처럼 근거 없는 낙관론을 스스로에게 강요하다 보면 신경은 원치 않게 더 초조해질 텐데 이런 태도가 아니라 현실에서 원치 않게 다시 상처 받을 수도 있다는 씁쓸한 각오를 취하는가 여부로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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