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합리적 동물이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습니다. 이때 합리적이란 사유를 통해 여러 가지 가능성 중에 제일 나아 보이는 것을 선택한다는 뜻도 담고 있습니다. 이 말은 머리를 써서 제일 나아 보이는 선택을 할 때 어떤 판단 근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이를 자녀 공부에 대한 엄마들의 태도에 대입해 보면 엄마들의 목적은 자기 자녀가 성인이 된 뒤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서 좋은 일자리를 가지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고 이를 이룰 수 있는 수단 또는 방법은 어릴 적부터 공부를 많이 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수단 내지 방법은 어떻게 알게 된 것일까요? 과연 엄마들이 객관적인 자료와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내린 합리적인 결론일까요? 자기 자녀가 미래에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 것은 무척이나 합리적이지만 그를 이룰 수 있는 수단의 합리성, 즉 그 수단을 선택했을 때 미래뿐 아니라 현재의 아이에게 행복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아이로 하여금 자신의 삶이 지옥같이 여겨지고 나아가 그 지옥 같은 삶의 패턴이 미래까지 연장되는 것은 아닌지를 따져 묻는 합리성까지 고려한다면 비록 목적은 합리적이지만 그런 수단마저 합리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설사 엄청난 비용을 들여 사교육을 많이 시켜서 좋은 대학에 들어갔더라도 아이의 사춘기 시절은 온통 심한 불안과 초조함 그리고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조차 제대로 확인할 수 없어서 짙은 혼란과 절망감으로 가득 차 있어서 성인이 된 뒤에도 사춘기 때의 어둡고 불안한 경험을 통해 세상을 볼 것이기 때문에 좀처럼 행복감을 느낄 수 없고 설사 행복한 순간이 찾아와도 그 행복을 잃어버릴까 봐 노심초사하면서 그 행복한 순간을 억지로 소유하려 해서 그 결과 행복감이 사라져 버리면 그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어둡고 초조한 세계관은 그로 인해 더 어두워질 뿐만 아니라 "역시 그럴 줄 알았어"하는 생각 때문에 더 깊은 좌절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경쟁지상주의에 빠진 그는 행복감마저 경쟁과 그에 따른 소유의 대상으로 여겨서 누구로부터 빼앗기지 않으려면 경쟁에서 지면 안 된다는, 휴식은커녕 잠시의 숨 돌리기도 허락하지 않아서 신경은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져서 그로 인해 경쟁이라는 색안경은 점점 더 현실을 편협하게 보도록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자녀를 둔 엄마들의 불안은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요? 미뤄 짐작하건대 엄마들의 불안은 제가 젊을 때 받아 봤던 "행운의 편지", 그러니까 "이 편지를 정해진 시간 안에 남에게 보내지 않으면 당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다"라는 섬뜩한 내용을 담고 있는 개떡 같은 편지의 성질과 비슷한 괴소문 때문일지 모릅니다. 그것도 공부 양과 좋은 대학 좋은 직장으로 풀이되는 자녀의 행복 간의 인과관계를 증명해 줄 수 있는 객관적인 수치 같은 증거가 없고 "~카더라" 식으로 "어린 자녀가 미래에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일찍부터 사교육을 시키고 다른 일은 엄마가 다 알아서 해 주면서 아이는 공부에만 전념하게 해야 아이가 미래에 행복해진다더라" 식의 섬뜩한, 사회적으로 널리 퍼진 입소문의 형태로 말이지요.
그런데 어떤 엄마들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릅니다. "남들 엄마들이 대부분 그렇게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어서일 텐데 무슨 뾰족한 다른 수가 있냐?"라고 말이지요. 객관성이라는 것이 근사한 느낌을 주는 표현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그 객관성이라는 실체를 확인하기 어려워서 사람들은 흔히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서 다수의 편에 서곤 합니다. 이때 그런 행위를 하는 이유는 객관성을 보장하는 듯한 심리적 안정감인데 그 근거는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다수가 그 선택을 한 것은 다 그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는, 다수에 속해서 안심이 되긴 하지만 객관성의 근거는 빈약한 엉성한 추론일 뿐입니다. 설명을 돕기 위해서 잠깐 삼천포로 빠지자면 철학의 논리 중 하나인 "귀류법" 즉"어떤 명제가 참임을 직접 증명하는 대신, 그 부정 명제가 참이라고 가정하여 그것의 불합리성을 증명함으로써 원래의 명제가 참인 것을 보여 주는 간접 증명 방법"을 통해서 불안한 엄마들이 다수의 편에 서는 다중 선택을 반박할 수 있을 텐데 이를 위해서 우선 엄마 자신이 어린 자녀의 입장이 되어서 "좋다, 싫다"의 범주와 함께 "가능하다, 가능하지 않다"는 범주를 사용해서 어린 자녀가 공부에만 전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추론의 근거 또는 바탕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선천적인 인간의 조건입니다. 한 예로 얼마나 사실과 부합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의 최대 집중 시간은 40분 내외라고 합니다. 물론 커 가면서 노력을 통해 또는 주어진 과제의 성질로 인해 편차가 생길 수는 있겠지만 인간에겐 넘어설 수 없는 절대적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런 현실적인 조건을 무시하면서 스스로 또는 타인에게 무조건 많이 공부할 것을 강요한다면 그 학습의 효율성은 급격히 떨어지거나 피로감과 권태로움 그리고 과부하로 인해 생기는 짜증 때문에 잔머리를 굴려서 눈에 띄지 않게 요령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열악한 한국의 상황에서 배 부른 소리일지는 모르겠지만 주로 암기식 공부에만 에너지를 거의 다 사용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옆 책상에 앉은 친구를 속내를 조심스럽게 내보일 수 있는 "친구"가 아니라 언제 나를 공격할지 모르는 잠재적인 경쟁자로만 여기게 되면 자기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려갈 수 있는 삶의 기술을 제대로 익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협력이 필요한 경우에도 내 것을 빼앗아 갈 거라는 위기감 때문에 선뜻 손을 내밀 수 없게 되어서 결국 심한 무기력감과 함께 초조함을 동반하는 심한 좌절감을 느낄 수 있고 이는 자기에 대한 현실적인 인간적 자긍심을 잃게 만들어서 세상이 온통 무섭고 두렵게만 여겨지게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반복적인 무기력함과 좌절감이 일으킬 수 있는 자기 모멸감이나 자기 혐오감을 쉽사리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힘든 감정을 허구적으로 없애기 위해 과장되고 억지스러운 자기 모습을 꾸미려고 할 수 있습니다. 설사 옆에서 보면 말도 안 되고 허황되어 보이더라도 정작 본인은 연극의 주인공이 된 듯이 환상에 사로잡혀서 도취의 상태에서 무기력감과 좌절감을 마술적으로 없애 보려는 시도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무작정 아이에게 공부만을 사실상 강요한다면 효율성 측면에서 긍정적이지 않을뿐더러 아이의 미래에 대해서도 해로울 것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래서 아이의 건강한 여러 측면의 발달을 촉진하고 장밋빛 행복은 아니지만 아이의 행복, 나아가 엄미와 자녀 사이에 때론 갈등이나 다툼이 있을지라도 전반적으로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도 적절한 양과 수준의 학습을 자녀에게 시키면서 아이가 다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용인하는 것이 필요할 텐데 이때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공부 외의 다른 활동의 종류를 엄마가 일일이 정하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설사 엄마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아이 스스로 그 활동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또한 공부하는 시간의 양은 아이와 상의해서 정하되 지나치고 엄격하게 정해진 시간과 양을 기계적으로 지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서 유연하게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이 가능해지려면 개인으로서의 엄마가 자신의 개인적인 취향과 관심을 처한 현실적 조건 속에서 어느 정도라도 실현하는가와 함께 자녀를 나와는 다른 선천적인 취향과 관심도 가지고 태어난 엄연한 개인임을 인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가 아직 몹시 서툴러서 주변, 특히 엄마의 도움을 많이 필요로 하지만 가끔 받는 도움을 바탕으로 눈에 확 띄지 않지만 차츰차츰 커 가는 자율적인 능력을 통해서 성장해 갈 수 있는, 엄마와 다른 타인임을 설사 힘들더라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아이의 행복만을 바라면서 정작 엄마 자신의 삶은 소홀히 하면서 잘 챙기지 않는다면 나중에 아이들이 훌쩍 큰 뒤 혼자 버려진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 "내가 왜 살았나?" 하며 헛헛한 공허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고 중요한 점은 그 공허함 때문에 자녀의 삶에 자꾸만 더 개입해서 자기 맘대로 만들려는 악순환적인 집착에서도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