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울증, 극도의 흥분과 극도의 절망 사이 (1)

by 조태진

90 년대 중반 고작 서른한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가객 김광석의 죽음은 조울증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에 동의하지 않고 타살되었다는 의혹도 있었지만 말입니다. 이제는 카세트로 음악을 들을 수 없게 되었지만 예전에 오디오 기계에 카세트를 집어넣을 수 있었을 때 그의 카세트를 사서 듣곤 했는데 그의 콘서트 현장을 녹음한 그 카세트테이프에서 그는 "분위기가 얼마나 떨어지는지 가 볼 때까지 가 봅시다"라고 말하면서 우울한 노래들을 계속 불렀습니다. 알고 계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지만 그가 동물원 멤버로 활동하기 전에 이른바 운동권 노래패라고 불리던 "노찾사"의 멤버여서 그 노래패에서 안치환과 활동을 같이 하기도 했습니다. 신문 등을 통해 그가 왜 노찾사 활동을 그만두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어쩌면 그는 자신의 현실과 그가 부르는 운동권 노래와의 심한 괴리감을 느끼고서 심한 마음의 부담을 느꼈거나 어쩌면 죄책감마저 느꼈을지 모릅니다. 이른바 "민중"의 고달프고 억을 하고 비참한 삶을 정의와 평등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어서 혁명적으로 바꾸자는 노랫말과 한잔에 꽤나 값이 나가는 뜨거운 커피를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마시거나 비싼 안주는 아니어도 "시대의 아픔"을 토로하면서 소주 한잔에 파전을 안주로 먹는 삶과의 긴장 관계를 그는 못 견뎌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는 그런 삶이 몹시 "위선적"이라고 느끼면서 괴로워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시대의 아픔"이니 "민중 해방"같이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월세를 낼 형편이 되지 못해서 국유지에 불법으로 허름한 판잣집을 만들어 살다가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어느 날 갑자기 국가로부터 퇴거 명령을 받고 이른바 용역으로 불리는 건장한 젊은 남자들이 허름한 자기 집을 헐어버려서 망연자실해 있는 부모 옆에서 아직 현실의 잔인함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어린 여자 아이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멀뚱히 서 있는 장면에 막막한 슬픔과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노릇을 어떡해"하는 그 막막한 슬픔 앞에서 심한 무력감과 그러면서도 호프에서 그다지 비싸지 않은 안주를 곁들여서 시원한 맥주 한잔을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죄책감마저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도저히 더 이상은 운동권 노래를 부를 수 없어서 대중가요를 부르는 길을 선택했을지도 모릅니다.


아주 오래전에, 그러니까 배우 설경구가 삼십 대 초반일 때 찍은 "박하사탕"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영화는 시간을 거꾸로 뒤집어서 현재로부터 과거로 돌아가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극 중 영호(설경구 분)가 왜 그런 행동을 저지르게 되었는지, 그리고 영화의 유명한 장면으로 높은 철교 한가운데 서서 둔탁한 소리를 내며 그를 향해 달려오는 기차를 등지고서 왜 그가 "나 돌아갈래"라고 절규했는지를 영화가 끝을 맺을 때쯤에야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 그가 아직 청춘이었던 어느 날 야유회를 가게 되었고 거기서 순임(문소리 분)에게 사랑을 느꼈습니다. 80년 그는 군 복무 중이었는데 광주에서 일어난, 정치 사회적인 혼란을 틈타 불법적이고 폭력적으로 사실상 정권을 차지한 독재자 전두환 세력에 반기를 든 광주항쟁을 진압하는 공수부대에 차출되고 생명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긴박한 공포 속에서 캄캄한 밤에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어린 여고생을 실수로 쏴 죽이게 됩니다. 그저 총기 사고였을 뿐이지만 그는 그 일로 괴로운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마치 "그래, 나는 원래 나쁜 놈이야"라고 하듯이 자기 자신을 윽박지르며 점점 자발적으로 악인이 되어갑니다. 마치 그렇게 하면 자기 마음이 편해질 것처럼 말이지요.


그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제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위악적"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억지를 부려 가면서 "나는 원래 천성이 나쁜 놈이야"라든가 한발 더 나아가자면 요즘 영화나 드라마의 추세이기도 한 "인간은 원래 요것밖에 안 돼. 사랑, 배려, 공감? 개 폼 잡지 말고 그 따위 말은 집어 쳐! 인간은 원래 구제불능이라고!" 하면서 젊은 날의 높디높은 이상과 그에 비례해서 생기는 심한 무력감, 그것도 "지금 내가 누리는 사회경제적인 상태를 포기하기 싫어, 아니 겁 나"하는 마음 때문에 생기는 괴로운 무력감 사이의 심한 괴리감 때문에 어떻게든 견디기 힘든 괴로운 마음에서 벗어나고자 애를 쓰는 것을 "위악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와 비슷하게 저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김광석도 어처구니없는 현실과 그저 "우리 인간들이 이렇게 살았으면, 또는 이렇게 살 수만 있다면"이라는 막연하고 아주 멀어 보이는 소망과 현실과의 괴리 때문에 생긴 끔찍한 긴장을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서 이른바 "사회적" 문제에는 애써 눈 감고 남녀 간의 흔해빠진 사랑노래만 죽어라 하고 불렀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요즘도 흘러간 노래를 틀어주는 라디오에서 그가 생전에 른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라는 노래를 간혹 듣곤 하는데 그 노래에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꿈에 보았던 길 그 길에 서 있네. 설레임과 두려움으로 불안한 행복이지만 우리가 느끼며 바라볼 하늘과 사람들. 힘겨운 날들도 있지만 새로운 꿈들을 위해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햇살이 눈 부신 곳 그곳으로 가네. 출렁이는 파도에 흔들려도 수평선을 바라보며 햇살이 웃고 있는 곳 그곳으로 가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적지 않은 노래에서 바다와 하늘이 맞닿는 수평선 너머에는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하지만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제대로 잡히지 않는 영원한 안식처, 그러니까 흘러간 80년대 식으로 말하면 어떤 억압도 착취가 없고 그래서 슬픔도 고통도 절망도 그리고 분노도 없는 꿈과 같은 세상이 있을 거라는 바렘을 노래합니다. 런데 그런 꿈과 같은 세상을 꿈꾸다가 현실과의 괴리가 너무 깊고 넓어서 자칫하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은 깊고 캄캄한 절망으로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목표를 너무 거창하게, 그것도 구체성이 많이 결여된 추상적인 높은 목표를 정하고 게다가 한치의 예외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마치 숨통이 조여와서 숨이 막힐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고 그 결과 몸과 마음에서는 자신의 바렘과는 달리 힘이 쪽 빠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불쾌한 경험이 자꾸 반복되다 보면 자신에 대한 실망감을 넘어서 혐오감마저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깊고 캄캄한 절망을 반복적으로 느끼면 공포스러움과 절망적인 낙담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점점 더 추상적으로 이상적인 상태, 즉 언제나 평온하고 행복하기만 한 극단적인 상태를 간절히 바라게 되기도 합니다. 겪어 보지 않아서 짐작일 뿐이지만 끔찍한 고통을 겪는 말기 암 환자가 고통이 전혀 없는 상태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도 그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가갈수록 점점 멀어지거나 사라져 버리는 무지개처럼 그 목표는 너무 거창하고 높아서, 게다가 예외도 전혀 인정하지 않아서 도달할 수 없고 설사 주관적으로 잠깐 목표를 이루었다고 판단하더라도 완벽주의의 성질을 띤 목표는 다시 멀어져서 사람의 마음과 육체를 녹초로 만들어서 결국 심한 우울증에 빠지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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