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좋은 대학 입학 그리고 행복과의 관계(1)
인간은 언어적 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한 존재입니다. 이를테면 엄마라는 단어는 돌봄, 육아, 집안일 등을 연상시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런 언어적 연상은 선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외부에서 사실상 강제된 관습이나 관행 나아가 제도라는 환경적 요소를 통해서도 연관성을 가지게 됩니다. 좀 뜬금없는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조선시대에 특히 양반의 집안에서 태어나서 우월한 사회경제적인 뒷배경을 가진 남자는 본부인 외에 첩을 두고 사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거나 도덕적으로 비난받지 않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부유하고 사회적으로도 높은 위치에 있는 남자가 첩을 두고 산다면 법적으로는 처벌받지 않겠지만 윤리적으로는 비난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첩을 둔 남자의 본부인도 어쩌면 그런 관습 때문에 첩의 존재를 인정할지라도 자기 남편이 다른 여자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에 대해서는 속으로 못마땅하거나 왠지(?) 마음이 불편하고 속에서 질투나 시기심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설혹 그 불편한 마음을 조선시대 관행, 달리 말해서 조선시대의 보편적 윤리나 질서 그리고 그에 기반한 사회적 제도 때문에 좀처럼 자기의 정직한 마음으로 인정하지 못하더라도 말이지요. 이에 빗대어 말하자면 엄마라는 존재,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엄마가 마땅히 수행해야 할 행동들도 분명히 선천적인 성질을 갖고 있지만 한 사회나 특정 시기에 암묵적으로 또는 공공연히 사회적으로 공유되어 사실상 강제된 역할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물망처럼 엄마의 역할과 엄마라는 존재가 아닌 ㅇㅇㅇ이라는 이름을 가진 개인의 삶과의 유기적 관계는 자녀의 보육이나 돌봄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저는 앞서 사회적으로 공유된 "엄마의 역할"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 표현을 바탕으로 풀어 얘기하자면 그렇게 사회적으로 공유된 엄마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거나 사회적으로 비난받을 수 있습니다. 일례로 시어머니나 남편으로부터 "너는 엄마가 돼서 어떻게 그렇게 하니? 남의 엄마들은 너 같지 않은데" 하는 비난 말이지요. 그리고 그런 비난을 듣지 않더라도 자기 자신이 "내가 엄마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몹시 불편하고 불안해질 수도 있습니다. 이때 머릿속으로는 "좋은 엄마"에 대한 관념이나 모습이 떠 오를 텐데 이런 관념이나 모습은 선천적이기라기보다는 언젠가 어디서 듣고 본, 예를 들면 허구적인 성격의 영화나 드라마 속 장면과 대사일 수 있고 현실과는 좀처럼 접점을 찾을 수 없는 공자님 말씀 같은 육아나 돌봄에 대한 티브이 강연이나 짤막한 유튜브 강연 속 얘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강연은 주로 자녀가 나중에 커서 행복해지려면 이렇게 키워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고 한국의 특성상 그 내용은 거의 어떻게 하면 자녀가 학교 시험이나 수능에서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는지, 그래서 이른바 스카이 대학에 들어가서 좋은 직장에 취업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들입니다.
저는 다른 글에서 불안의 긍정적 측면과 함께 부정적인 측면도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건 마치 늦은 밤 정전이 되어서 손전등으로 지금 당장 필요한 물건을 찾는 것과 많이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즉 좋은 엄마 역할을 하려고 마음이 다급해진 엄마는 외부에서 접한 "엄마란 마땅히 ~ 해야 한다"는 말에 따라서 신경을 온통 자녀의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할 때 자녀가 어떤 심리적 육체적 상태에 놓이게 될지 그리고 자신의 마음은 어떻게 변하는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생기는 마음의 변화, 즉 자신과 자녀의 마음에 생기는 불편함이나 속상함, 또는 짜증이나 화 같은 정직한 감정을 가려 버리는 것은 다름 아니라 "나는 지금 내 아이의 장래를 위해 무척이나 애쓰고 노력하고 있다"는, 마치 마법의 주술과도 같은 "자기 합리화"입니다. 그렇지만 마치 캄캄한 어둠 속에서 손전등에 의존해서 꼭 필요한 물건을 찾으려고 할 때 기억에 의존하면서 손전등의 방향을 바꿔가며 주변을 살필 수 있듯이, 아니 넘어지거나 다치지 않기 위해서 우선 주변을 살펴야 하듯이 우선 "내 아이가 행복해지려면 이라는 목표를 세웠다면 어떤 조건들이 아이의 행복, 그것도 그저 먼 미래뿐 아니라 먼 미래의 행복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지금 여기에서 자녀의 행복을 마련해 주고 증진시킬 수 있는지도 자신의 어릴 적 기억의 도움을 받으며 두리번거리면서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주변(조건)을 두리번거리게 되면 그간 합리화로 인한 명분 때문에 가려졌던 구체적인 현실의 모습들이 비로소 보이게 될 수 있는데 문제는 심한 불안으로 인해 순간 보였던 현실의 모습들이 자꾸만 희미해진다는 것입니다.
그 어느 부모, 특히 어느 엄마도 자기 자녀가 불행한 삶을 사는 것을 원치는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자녀의 "행복"을 바랄 때 머릿속으로 흐릿하게라도 또는 막연하게나마 다 커서 좋은 대학교의 강의실에서 강의를 듣는 모습이나 일류 기업에 취업하거나 버젓한 고급 공무원이 되어서 높은 보수를 받으면서 열심히 일하고 고급스러운 가구와 가전 제픔이 있는 브랜드 있는 넓은 아파트에서 배우자와 자녀와 함께 비싼 음식을 먹으면서 사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정신적 시선"을 지금 자녀의 처지로 돌려 본다면 그 엄마의 머릿속에는 어떤 장면들이 떠 오르고 그에 따라 마음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학교 수업을 마치고 나서 늦은 밤까지 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다음 날 새벽 한두 시까지 밀린 학원 숙제를 해서 학교 수업시간에 꾸벅꾸벅 졸거나 학교 수업은 들을 여유조차 없이 학교 수업시간에 몰래 학원 숙제를 하고서 학교가 파하면 다시 학원에 가고 저녁식사는 근처 편의점에서 매일 같이 컵라면이나 삼각김밥으로 때우면서 그로 인해 생긴 만성적인 스트레스는 컵라면을 먹으며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보거나 게임을 하면서 감질나게 풀력고 하는 바로 지금 여기의 자기 자녀의 모습과 처지를 상상해 본다면 말이지요. 게다가 감추려야 감추기 거의 불가능한 자녀의 피곤하고 짜증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 표정과 맥 빠지고 생기 없어서 무뚝뚝한 자녀의 목소리를 한번 기억해 본다면 말이지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