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의 원인으로 이상적인 상태를 갈구하다가 못날 뿐만 아니라 꿈쩍도 하지 않는 현실 때문에 더 이상 그런 이상적인 상태에 대한 희망을 유지할 수 없어서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끔찍하고 염세적인 절망을 꼽는 이론이 있습니다. 이 이론을 풀어 말하자면 이상적인 희망을 잃은 상태는 홀가분하고 가벼운 상태가 아니라 벗어나고 싶은 상태인데 그 이유는 완전히 절망적인 상태가 정신적인 공허함과 함께 끔찍한 심리적 고통을 야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삶의 희망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들은 그런 정신적 공허함과 그에 뒤따르는 심리적인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을 많이 마시거나 좀 민망한 말이지만 섹스에 몰두한다거나 명품 옷이나 가방 등의 구매에 병적으로 집착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때 조심해야 할 점은 그런 현상을 일률적이고 기계적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병적으로" 보일 정도의 중독 현상과 비숫한지 여부를 세심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즉 자신이 느끼는 괴롭고 허망한 상태로부터 한없이 도망치려고 하는 병적으로 절망적인 시도인가 여부도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엉뚱한 얘기지만 사람들은 "우울하다"는 표현을 어떻게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갓일까요? 농담 같은 말이지만 어떤 사람이 "나는 취업 면접에 10번 참석해서 10번 다 떨어져서 마음이 무척 가볍다"라고 표현한다면 이를 들은 다른 사람들은 그를, 즉 그의 마음의 상태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해를 돕기 위해서 심리학의 행동주의 이론을 빌리자면 행동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정적 강화(보상: positive reinforcement)와 부적 강화(처벌: negative reinforcement)인데 이를 흔한 표현으로 바꿔 말하자면 "당근과 채찍"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동주의의 근간은 제멋대로 바꿀 수 없는 선천적인 조건이 존재함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데 종 특성에 따라서 그런 보상과 처벌의 조건이 다소 다르겠지만 그 어느 생명체도 "좋다, 싫다"라는 선천적인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생명체도 좋게 느껴지는 상태를 추구하고 싫은 상태를 피하려는 원칙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한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이를 우울증에 대입해 보면 처한 상황 속에서 거듭해서 부적 강화를 겪으면 "나는 안 되나 봐" 또는 "해 봤자 소용이 없어"하는 자포자기의 상태에 빠져서 행동주의의 아주 중요한 개념인 소거(extinction) 현상이 나타날 텐데 소거 현상이란 어떤 의도된 행위, 즉 외적 보상을 추구하는 행동을 거듭하다가 더 이상 또는 아예 기대되는 외적 보상이 주어지지 않을 때 그 의도된 행동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의도한, 즉 외적 보상을 바라고 추구한 행동을 더 이상 하지 않는데 왜 이로 인해 우울함이나 우울증에 걸릴 수 있게 되는 것일까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좀 유치한 예를 들자면 맛있게 먹곤 했던 음식이 더 이상 맛있게 느껴지지 않아서(부적 강화) 그 음식을 더 이상 먹지 않는다고(소거) 우울해진다고 한다면 이 상태를 접한 사람들은 어리둥절해하거나 그를 반쯤 정신이 나간 이상한 사람으로 여길 것입니다.
도구적 또는 조작적 행동주의의 창시자인 스키너는 자신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서 작은 철장에 쥐 한 마리를 가두고서 네모난 철장 한 끝에 막대기 하나를 설치해 놓고 이 막대기와 작은 물통을 연결해서 쥐가 이 막대기를 누르면 물통이 올라와서 쥐가 물을 마실 수 있게 하는 실험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저도 한국에서 심리학을 전공할 때 실제로 해 본 실험인데 실험자가 의도한 결과, 즉 쥐가 막대기를 누르게 하기 위해서 잔인하게도 쥐에게 오랜 시간 동안 믈을 주지 않아서 심한 갈증 상태를 유발해야 합니다. 즉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자연적 욕구인 물을 마시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실험 조건으로서 말이지요. 꽤나 길게 스키너의 실험에 대해 썼는데 저는 이 설명으로 선천적인 조건, 즉 그 어느 생명체도 벗어날 수 없는 자연적 조건들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그리고 이 선천적인 욕구가 같은 종에 속하는 생명체들에게 일반적임을 밝히고 싶어서이기도 합니다.
앞에서 저는 더 이상 맛있지 않은 음식의 예를 들었은데 그 경우 우울증에 빠지지 않는 이유는 그것 말고 다른 맛있는 음식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경제학 용어로 표현하면 "대체재"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쉬운 예로 자기가 마시고 싶은 브랜드의 사이다가 매장에 없어서 설혹 아쉽더라도 매장 내의 다른 브랜드의 사이다나 콜라나 주스 같은 다른 대체재를 구매하는 경우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상상하기 싫지만 전쟁이 터져서 음료는커녕 물조차도 구하기 힘들어진다면 사람의 마음은 절박해질 텐데 그 이유는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이 생명체의 생존 조건이 심하게 위협받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종의 생존 조건들은 무엇일까요? 거칠게 표현해서 다른 하위 동물들의 생존 조건인 먹이(음식), 물, 수면 등도 있겠지만 하위 동물들과는 겹치지 않는 인간만의 생존 조건은 없는 걸까요? 육체적 생존뿐만 아니라 정신적 심리적으로 건강한 생존을 위한 조건 말이지요. 이를 위해서 엉뚱한 생각 하나로 글을 마무리하자면 만약 먹이를 먹어서 배가 찼지만 목이 몹시 마른 철장 속의 쥐에게 막대기를 누르면 먹음직한 치즈 조각 하나가 올라오게 한다면 쥐는 어떤 행동을 보일까요? 과연 그 치즈 조각이 믈의 "대체재"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