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우리는 "내가 그렇게 생겨 먹었는데 나 보고 어쩌라고"라든가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런 표현은 종종 자기변명이나 타인을 비난하거나 원망할 때 쓰이곤 하지만 이 두 표현에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배우지 않고도 알 수 있는 또는 느낄 수 있는 선천적인 인간의 한계를 표현할 때도 쓰일 수 있을 것입니다. 선천적이라는 흔한 표현을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경험에 선행하는 또는 앞서는"을 뜻하는 선험적(a priori)이라고 달리 표현했는데 이런 선험적 성질에 대한 몇 가지 예를 들면 아기가 태어났을 때 엉덩이를 때리면 울음을 터뜨린다던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을 한다던가 눈을 깜박거린다던가 하는, 인간이라면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자율적인 반응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선험적 반응이 아니고 인간에게 씨앗처럼 주어진 선험적 성질들도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즉 씨앗처럼 아직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어도 씨앗 속에 잠재된 성질처럼 인간에게 가능성으로 주어지긴 했지만 인간의 인위적인 노력과 정성을 통해서 현실로 드러내고 현실 속에서 키워야 하는 잠재된 가능성으로 말이지요. 그런데 씨앗이 존재하는 환경의 조건들이 열악하다면 씨앗이 제 가능한 성질들을 제대로 발현시킬 수 없거나 어렵듯이 인간의 선험적인 성질들도 주변 환경이 몹시 좋지 않다면 현실에서 발현되기가 무척이나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다른 생명체들과는 달리 자기 자신과 환경을 눈여겨 돌아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상적으로 들리실지 모르지만 이 능력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과 자신의 환경을 마치 액자 속 그림처럼 어떤 측면들에 주의하여 바라 봄으로써 현재의 불만족스러운 상태를 어느 정도라도 변화시키려고 시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능력이 잘못 쓰이면 어두운 과거에 매여 마음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깊고 절망적인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고 이룰 수 없는 장밋빛 환상에 빠져서 우울한 현실에서 마냥 도망치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다른 동물들에게도 일종의 의지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예를 들면 먹잇감을 노릴 때나 천적과 싸우거나 도망치는 행위의 뒷면에는 의지가 있고 이 의지는 다름 아닌 생존에 대한 근본적인 욕구가 받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믈론 자기 보존 그리고 자기 보호 본능에 젖줄을 댄 선험적인 욕구로서 말이지요. 그렇다면 인간의 경우는 어떠할까요? 이런 동물적인 욕구들이 인간에게도 존재할 텐데 우선 먹잇감(음식과 음료)을 위해서는 설사 힘들고 하기 싫어도 자신의 몸을 부려 노동을 해야 하고 부당하게 자신을 비방하거나 조롱하는 상대방에게 적의를 느껴서 복수(상대방에게 화를 내거나 반박하는 행동 등)를 하기도 하지만 그 상대방의 사회경제적 권력이 너무 커서 상대하기 어렵거나 위험하다면 의지를 통해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참는 행위 등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인간은 물질에 대한 욕구만이 아니라 정신적 심리적 욕구도 가지고 있는데 이 욕구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혼자 살 수 없는 군집 동물이고 그것도 자신이 지니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선험적 성질들을 바탕으로 타인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때로는 이를 바탕으로 공감 또는 동감할 수 있는 선험적 성질에서 비롯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선험적인 성질들은 씨앗의 형태이기 때문에 그런 성질의 성장이 심하개 방해받는다면 그에 대한 결과로 욕구불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의 믿음이지만 그런 욕구불만은 "~한 욕구가 충족되지 않고 있다"는 십리적 신호로 전달된다고 생각합니다. 좀 단순한 예를 들면 목이 마른다거나 배가 고프다거나 졸린다는 선험적 신호처럼 말이지요.
이와 비슷하게 정신적 심리적 신호도 어떤 결핍의 상태를 가리키는데 중요한 점은 "무엇이" 결핍되었다는 신호입니다. 이전 글을 마칠 때 저는 목이 몹시 마른 철장 속의 쥐에게 막대기를 누르면 먹음직스러운 치즈 조각이 올라오도록 실험 조건을 만든다면 쥐가 어떻게 행동(반응)할 갓인가라는 우스꽝스러운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런 우스꽝스러운 질문을 굳이 드린 이유는 어떤 특정한 욕구, 다시 말해서 어떤 특정한 목적을 지향하는 욕구의 충족은 당연히 그 특정한 욕구가 원하는 목적이 어느 장도라도 이루어지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렇게 얘기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릅니다. "등 따습고 배 부르면 그만이지"라고 하면서 "그런 것 없이도 사는 데 아무 지장도 없더라"라고 말이지요. 이 말이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닌데 그 이유는 먹고 자고 쉬는 행위는 필수 불가결한 기본적인 욕구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 아무도 이런 기본적인 욕구의 충족을 소홀히 하거나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기본적인 욕구가 충분히 충족되었다고 가정했을 때 삶은 어떻게 변할까요? 더 이상 바라는 바 없이 완전히 만족스러운 상태로 변할까요? 비록 먹지 못해 기력이 없거나 죽게 되고 잠자지 못해 신경이 날카로워지거나 맥이 빠지고 쉬지 못해 지쳐 쓰러지지 않더라도 자신의 삶의 방식이나 모습에 대해 의미를 느끼지 못하거나 권태롭게 느끼고 내가 누구인지, 즉 무엇을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바라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서 혼란스러운 상태는 분명히 자신에게 "무엇인가" 결핍되어 있다는 정신적 심리적 신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결핍된 상태에 대한 구체적인 신호로는 무엇엔가 쫓기고 있는 듯한 불안, 초조, 가슴속이 텅 비어 있는 듯한 느낌과 함께 세상의 모습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을 뿐 아니라 뭔가에 의해 가로막혔거나 영화 스크린을 보듯이 자신과 세상이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 그리고 왠지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그 화의 대상이 담배 연기처럼 흩어져 버리는 느낌,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느낌이 둔해지거나 심하면 자신이 자신 같이 여겨지지 않거나 때로는 낯설게 여겨지는 불쾌하고 섬뜩한 느낌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