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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태진 Mar 14. 2022

이타주의와 유토피아, 그리고 이기주의 (5)

앞선 글에서 저는 인간이 적당한 물질을 소유해도 왜 여전히 행복해지지 않는지와 더불어 헛헛함과 권태로움을 잊으려고 해 봐도 잊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게다가 점점 그 말초적인 쾌감의 정도가 점점 더 낮아지는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지극히 말초적인 쾌락만을 계속 추구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이유는 프로이트가 정립한 개념인 의 추동력으로서의 쾌락 원칙에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흔히들 말초신경적인 욕구는 추구하지 말고 심지어는 버리라고까지 말하는데 저는 말초신경적인 쾌락은 그 자체로서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말초신경적 자극은 사람으로 하여금 일차적인 주의나 관심을 일으키기 때문에 만약 말초적 자극애 반응하는 말초신경이 없다면 어떤 대상이나 현상에 주의를 기울일 수 없을 텐데 그렇다면 인간의 삶은 어떤 흥미도 유발하지 못해서 지루하고 답답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삶의 헛헛함과 권태로움을 잊기 위한 목적으로 잠시 동안만 짜릿한 말초신경적인 행동만 하다 보면 삶이 즐겁고 행복하게 되기는커녕 점점 더 무료해지고 속이 텅 빈 것 같은 느낌도 점점 더 강해져서 결국엔 "나 뭐 때문에 살지?" 또는 "무얼 바라고 살지?"와 같은 두렵고 절박한 질문과 마주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자신의 마음에서 작은 소리가 들릴 수도 있는데 그건 처해진 현실의 상황을 감안하면서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어" 또는 "적어도 이렇게 살 수는 있잖아?" 같은 내면의 메시지일 것입니다. 물론 그 작은 내면의 소리는 마치 나침반의 바늘처럼 떨면서 방향을 가리킬 텐데 그 방향은 당연히 본인 자신의 결단과 그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함도 가리킬 테고 때로는 그렇게 모질게 마음먹고 노력해도 예상치 못한 우연들 때문에 당연히 정확하게 미래를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제 친구 중 한 명은 이타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싫은 내색을 노골적으로 합니다. 사람은 원래부터, 즉 유전적으로 이기적으로 태어났다고 하면서 말이지요. 세상 물정을 제대로 모르는 순진한(?) 어린아이라면 모를까 이 각박한 세상에서 삶을 살면서 이런저런 속상한 경험, 특히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 본 어른이라면 아마도 그 친구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실 것입니다. 좀 뜬금없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이제는 초로의  노인이 되었을 소설가 김현경 씨가 쓴 어느 소설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기억이 희미해서 제대로 옮기는 건지는 모르지만 심한 중병에 걸린 친구의 병문안을 온 어떤 친구가 병상에 누워 있는 친구의 사정이 너무 딱해서 눈물을 보였더니 소설 속 작가의 아바타로 보이는 다른 친구가 그녀에게 "도와주지 못할 거면 울지도 말라"라고 한 장면입니다. 이 구절을 읽자 저 잠시 황당한 기분이 들었는데 딱한 사정을 접하고서 슬픔이 느껴져야 물질적이든 심리적이든 움을 줄 수 있지 그 역은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오래된 기억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제 친구가 주장한 대로 인간이 자기만 알고 챙긴다는 뜻을 깊이 내포한 이기주의적(자기 본위적) 존재라면 도움은 주지 못해도, 아니 도움을 줄 수 없기 때문에 타인기 막히고 속상한 처지를 접하 되면 왜 자기도 모르게 딱하고 속상한 마음이 드는지, 그리고 그런 딱한 사정에 처하게 만든 사람이나 관습이나 제도에 대해 분노하게 되는지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기 때입니다.


그런데 제 눈에 그 찬구는 이른바 이타주의, 그것도 윤리적 명령으로서 청소년기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이타주의에 이를 갈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비단 저만은 아닐 텐데 이타주의는 이기주의와 날카롭게 대립하는 태도로서 "절대적인 헌신", "전적인 희생" "자기보다 남을 우선시 하는 것"등의 관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이기주의는 "나만의 이익", "나에 대한 배타적 관심" 등의 관념에 단단히 묶여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엉뚱한 질문이지만 이타주의라는 개념 속에 들어 있는 타인을 가족으로 좁혀 생각해 보면 나만 알고 내 이익만 챙기는 태도로서의 이기주의의 근간은 상당히 흔들릴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따져 가면서 내세우는 자기주장이 정당한 성질의 것이라면, 게다가 논의나 상의를 통해서 관철한 자기주장이라면 전적인 희생과 헌신 등의 가치와 연결되어 있는 이타주의도 몹시 위태로울 것입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이상적인 자본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저는 이 표현 중 "이상적(ideal)이라는 표현을 "전형적인(typical)"이라고 이해했습니다. 학문의 세계에서는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전형적이지만 단순화한 개념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는 복잡하고 이러저러한 모순들도 내포하고 있는 현실 속 또는 상상 속의 현상에서 서로 높은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 요소나 측면들만을 추출하고 상이한 나머지는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방식입니다. 이 추출의 과정은 종종 복잡한 현실 속의 농도, 빛깔 그리고 상들 중에서 이론을 정립하는 학자의 눈에 자신이 초안처럼 생각해 낸 개념 틀에 비추어 보았을 때 관련성이 적거나 심지어 모순적인 관계를 보이는 측면이나 요소를 제거하는 과정을 거치기도 하는데 이때 중요한 점은 그 이론을 정립코자 하는 학자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과 가치관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의 인간관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이론의 뼈대를 만들 때 자신의 세계관과 인간관에 기대어서  "~였으면 좋겠어" 하는 끈적끈적한 욕망을 바탕으로 이론적 틀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청소년기에 접하는 리로서의 이타주의나 그에 적대하는 이기주의도 현실 속에서는 찾을 수 없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즉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서 찾아볼 수 없는 "전형적인' 이론적 개념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더 보태자면 추상적 개념이 위험한 이유는 개별 사례들의 공통된 요소들을 추출하고 그 과정 중애 상이한 요소들을 제거하기 때문에 이른바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를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각합니다. 즉 현실 속의 어떤 측면에서 다른 점들을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그리고 때로는 허구적이거나 편협한 자신의 세계관과 인간관을 바탕으로 한 끈적끈적한 욕망을 함께 직조함으로써 실천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실천을 부추기기는커녕 때로는 그 추상적 개념과 단단히 결합되어 있지만 자연스러운 결합이 아니라 앞서 말씀드린 대로 끈적끈적한 욕망, 즉 영화나 드라마 같은 허구적인 성질의 욕망에서 비롯된 결합이어서 아직 삶을 오래 살아보지 못한 젊은 사람이 이 추상적 개념에 인위적으로 단단히 결합되어 있는 가치를 계속 추구하다 보면 기력도 점점 더 떨어지고 어쩔 수 없는 이기적인 욕구 때문에 스스로를 비하하고 책망하다가 결국에는 자신을 포함한 인간에 대해 짙은 무력함과 회의감  그리고 심하면 냉소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혐오할 위험마저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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