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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태진 Mar 19. 2022

이타주의와 유토피아, 그리고 이기주의 (6)

이상향이라는 막연한 뜻을 가진 유토피아를 사람들은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을까요? 이를테면 어떤 갈등도 어떤 고통도 어떤 억울함이나 슬픔도 없는 "이상적인" 사회를 말이지요. 좀 뜬금없어 보이는 말로 들리시겠지만 저는 허구적 성격의 환상이나 공상의 원재료는 다름 아닌 현실에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얻은 원재료들은 상상하거나 공상하는 사람의 주관적인 세계관과 가치관에 바탕을 둔 욕망을 통해 조립되고 가공되어서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허구적 대상이나 현상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저는 이상향으로서 유토피아도 이와 다르지 않은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고 믿습니다. 즉 각박하고 두려운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주관적인 욕망을 바탕으로 자신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행복한 "순간들" 또는 피하고만 싶었던 힘겹고 두려운 현실 속 경험과 반대되는 현상을 상상하고 짜깁기해서 "이런 세상에서 살 수 있다면"이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고 말이지요. 시 말해서 가족들과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는 일, 친구와 담소를 나누던 일 또는 친구들과 행복한 여행을 갔던 일 등을 토대로 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파편적인 흐뭇한 상상을 마치 영화 상상해 본다면 손상된 필름처럼 제대로 연결되지 않아서 삶의 연속성을 오롯이 담아낼 수 없을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어떤 대중가요 속에서는 "영원히 행복할 거야"라는 노랫말이 들어 있는데 그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사실 행복이란 반가운 손님의 뜻밖의 방문처럼 문득문득 느껴지는 정서입니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만약에 가슴이 뛰는 행복감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일상의 생활 속 과제들에 주의 집중하면서 그 과제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복잡하고 다양한 인간의 정서들이 나타날 수 없어서 평범한 인간이라면 어떤 자극, 설사 그 자극이 불쾌하더라도 그에 반응하지 못한다면 그에 대한 어떤 대비책도 마련해 보려는 의지로서의 마음도 생길 수 없을 것입니다. 론 그렇게 흥분되는 행복 말고도 마치 비가 그친 뒤 베란다 한쪽 구석에 들이치는 여린 햇살처럼 잔잔한 행복도 있겠지만 그런 잔잔한 행복도 자신도 모르게 찾아오거나 잠시 눈길이 가서 찾게 되는 행복일 것입니다.


그런데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어떤 갈등이나 모순 그리고 어걱정이나 염려 하나도 없는 삶을 꿈꿉니다. 이를 보다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서 정신질환으로 분류되는 건강염려증 (hypochondria) 예로 들 수 있을 텐데 이 정신질환에 걸린 사람은 특정한 신체적 질환이 있다고 확신해서 전문가인 의사가 특정 질환이 있다고 진단할 때까지 병원을 전전하면서 돌아다닙니다. 이를 완벽주의에 대입해 보면 관념적으로 아무런 모순도 염려도 전혀 없는 상태를 고집하는데 문제는 상상으로나마 그가 바라는 완벽한 세상의 모습을 제대로 그릴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저 언어로만 " 그 어떤 억압도 착취도 고통도 없이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라던가 "모든 사람이 어떤 갈등도 미움도 혐오도 없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어울려서 사는 사회"라는 막연하기 짝이 없고 마치 무슨 내용인지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추상화의 절편처럼  사람의 구체적인 삶에 대입하는 게 무척이나 어렵고 서로 간의 긴장된 관계를 보여주지 못하는 생명력 없는 추상적 가치만을 표현하먼서 말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교과서적으로 옳아 보이는 그 추상적 가치들을 실의 삶에 적용해 보면 우선 자유와 평등 같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긴장 관계 속에 놓인 가를 교과서적으로 적용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고  래서 원치 않게 심한 무기력증이나 끔찍한 염세주의, 즉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게 변한다는 거야. 그것도 타락의 방향으로 말이"와 같은 비참한 염세주의로 말이지요.


그런데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사들은 어째서 그렇게 하는 것일까요? 작컨대 그들은 아무런 위험도 손해도 없는 사회, 그래서 전혀 고통스럽거나 불안하지 않은 사회나 상태를 간절히 바랄지도 모릅니다. 이 문제는 그들이 머릿속으로 그리는 "완벽한 상태"가 결코 완벽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일 텐데 이는 개인적으로 주관적인 특정한 "결핍"을 충족시키려는 개인적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만 니라 그 누구도 인간인 이상 언어로 표현되는 추상적 관념이 아닌 구체적인 내용으로서 "완벽함"을 상상할 수 없고 게다가 상상력으로 그려 본 완벽함이란 정지된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순간일 뿐이어서 이를 구체적인 삶 속에서 고집을 피우며 지속시키려는 시도는 헛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간관계를 악화시킬 위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렸듯이 완벽함을 추구하는 이유가 아무런 불안도 느끼제 않기 위함이라면 건강염려증처럼 전혀 불안해지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하다간 신경이 너무 예민해져서 원치 않게 만성적인 불안에서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하는 악순환을 그릴 위험이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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