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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태진 Mar 22. 2022

이타주의와 유토피아, 그리고 아기주의 (7)

저는 이 일련의 글의 제목에 "이타주의"라는 개념을 넣었습니다.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라면 이타주의가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타주의를 위해서 그 반대편에 있다고 여겨지는 이기주의, 즉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뜻을 가진 이기주의적인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누가 주장한다면 이런 이타주의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그 이유는 자명하게도 그 누구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황당한 표현이지만 더구나 이 지구 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모두 이기적인 태도를 버리고 이타주의적으로만 산다면 타인을 이롭게 한다는 뜻에서 "타인"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타주의가 무척 고상해 보이고 한 없 드높은 가치로 여겨져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이타주의 앞에서 사람들은 한 없는 무력감과 절망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그런 자신에 대해 깊은 실망감과 죄책감을 느끼거나 심하면 인간이라는 존재를 하찮게 여기면서 비아냥거리며 냉소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저는 그런 냉소적인 사람을 보면 어처구니없어서 화가 나기도 하지만 그와 함께 절망에 가까운 짙은 슬픔도 느끼곤 합니다. 이런 경험을 처음 한 것은 90년대 초반이었는데 비록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밖으로 그. 말을 내뱉을 자격이 없어서 말은 할 수 없었지만 그 당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면서 최근에 개봉한 영화 제목을 패러디하자면 "무늬만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국가"로 남았는데 이를 지켜본 다수의 운동권 학생들이 깊은 실망감을 느끼면서 하나 둘 떠나가고 일부는 자발적으로 자본주의 질서와 체재에 포섭되기도 했을 때여서 저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바보들아, 동구권이 무너져도 사회의 모순은 지속된다고"라고 말이지요.


심리질환 중에는 강박관념과 그로 인한 강박행동이 있습니다. 언젠가 다른 글에서도  말했지만 "강박"이라는 표현의 영어식 표현은 "obsessive"로 이 단어는 "~에 사로잡힌"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상향을 추구하거나 이기주의를 천박하게 여기면서 그 반대의 이타주의를 설파하는 사람들은 "~에 사로잡힌 듯이" 또는 좀 더 일상적인 표현을 쓰면 "~에 홀린 듯이" 그런 주장을 펼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조금 삼천포로 빠지자면 세계적인 언어학자인 소쉬르는  기표와 기의를 구분했는데 이때 기표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수단)"이고 기의는 "가리켜지는 그 무엇"입니다. 그렇다면 이기주의와 대적하는 기표로서의 이타주의라는 개념이 가리키는 대상 는 현상이 있어야 하고 유토피아(이상향)라는 기표가 가리키는 대상 또는 현상이 존재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유토피아나 이타주의라는 기표는 어떻게  나타나게 된 것일까요? 앞선 글에서 이미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순간적인 행복의 상태를 경험하고서 이 행복이 깨지지 말기를 바라기도 하는데 이때 크든 작든 어느 공동체에는 갑과 을의 관계가 존재해서 서로 꿈꾸는 바람직한 상태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각자가 상상하는 이상향의 모습이 때론 사뭇 다르기도 한데 "악마는 디테일 속에 숨어 있다"는 표현처럼 총론적으로는 어떤 막연한 개념적 상태에 동의하지만 각론의 수준으로 넘어가면 서로 간에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해서 갈등이나 불화 심지어는 서로 간의 혐오를 조장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서로 다른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을 뿐 아니라 처한 사회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입장 내지 처지가 달라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설사 기표가 같더라도 서로 사뭇 다른 기의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이때 발생하는 문제는 주관적으로 흐뭇한 특정 상황만을 고집하며 그 특정 상황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다른 삶 또는 생활의 결이나 모습 등이 무사되거나 심지어 억압된다면 그 끝은 원하는 유토피아가 아니 힘을 가진 갑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독선적 횡포나 강제일 것이고 그보다 열세인 사람들은 비참하고 끔찍한 상황을 표현하는 디스토피아(dystopia)를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이를 갈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갑이 꿈꾸는 이상향도 환상이라고 달리 불릴 수 있는, 현실에서 지속될 수도 때로는 존재할 수도 없는 막연한 언어적 개념에 사로잡혀서, 즉 지배되어서 말이지요.


이기주의와 첨예하게 대립되는 이타주의도 이런 잔인한 성격을 가진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우선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으면서 타인의 이기주의를 만족시킨가는 것이 불가능해서 말이 안 되고 그런 이타주의를 실행한고 해도 그 유효기간이 너무 짧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독일의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자기 자신을 제대로 돌본다는 뜻을 가진 "자기애(Selbstliebe)"라는 개념으로 건강한 이기주의와 악성 이기주의, 즉 자기만 챙기는 자기 본위 주의적 이기주의를 나눕니다. 자, 유치한 예이지만 한번 상상해 보시지요. 끼니를 걸러가면서 행하는 이타주의가 굉장히 고상해 보이고 우러러 보이지만 우선 방법론적으로 그게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을지 말이지요. 그에 비해서 크리스마스 즈음에 구세군의 자선냄비에 몇 천 원 기부하는 것은 그리 대단해 보이거나 고상해 보이지는 않지만, 게다가 그 몇 천 원으로 고작 라면 서너 개만 살 수 있을 정도로 하찮은 액수의 돈이지만 그라도 조금만 마음먹으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그래서 이타주의와 이기주의(자기애)가 긴장감을 잃지 않으면서 공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즉 자신을 돌보면서도 빈곤 같은 열악한 조건 속에 놓인 다른 사람(타자)의 처지를 상상으로나마 어렴풋이 공감함으로써 그와 함께 "소소한", 그래서 사람들의 눈과 귀를 끌지 못할 작은 이타주의를 꾸준히 실행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말이지요. 글이 길어져서 선문답 식으로 느껴질지도 모르는 질문 하나로 글을 맺습니다. 인도에서 병든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돌봐서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이제는 작고한 마더 테레사 수녀에게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 "당신의 길을 따라가고 싶다"라고 말하자 그녀는 그에게 "우선 당신의 가족부터 잘 챙기고 돌보세요"라고 했답니다. 이 말을 한 마더 테레사의 속내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녀가 오만한 마음 때문에 속으로 "당신 같이 평범한 사람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니 분수를 알아라"라고 생각해서였을까요, 아니면 그녀가 인도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어떤 신부에게 보낸 편지 속의 표현인 "신이 나를 버렸다"라고 할 만큼 몹시 고단하고 때론 적반하장 식 배신 때문에 속상하기도 하고 게다가 자신이 헌신적으로 봉사활동을 해도 세상은 변하기는커녕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절망감 비슷한 느낌을 정신과 마음으로 뿐만 아니라 몸으로 절절이 느꼈기 때문이었을까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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