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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태진 Mar 24. 2022

이타주의와 유토피아, 그리고 이기주의 (8)

앞선 글에서 드린 질문에 대한 제 답변을 드리자면 저는 마더 테레사가 처음 봉사활동을 막 시작했을 때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난관에 부딪혔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이 헌신을 한 봉사활동에 대한 예상된 결과가 아닌 원치 않은 결과로 인해 자신이 오랫동안 행한 봉사활동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지를 몸으로 체득했기에 순간적 감동과 순간적 열정만으로는 그런 고단하고 지난한 봉사활동을 해 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겼을 테고 자신은 천주교 수녀로서 먹고살기 위한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웠지만 그녀에게 "당신의 길을 따르고 싶다"라고 말한 사람은 자신의 생계를 자신의 노동을 통해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봉사활동이 가져올지 모르는 고스럽고 힘겨운 감정들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에 까딱 잘못하다간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는 속담처럼 기 막힌 상황들과 자꾸 마주쳐서 결국엔 인간에 대한 배신감, 불신 그리고 혐오감에까지 빠질 수 있는 위험을 에둘러 표현하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릅니다.


좀 엉뚱한 얘기지만 60년대 미국 심리학계를 뒤흔들어 놓았던 행동주의의 기본 원칙은 특정 행동으로 인한 결과에 자주 또는 일관되게 노출되다 보면 그 행동에 대한 동일한 결과가 자꾸 나타나고 이 행동에 뒤따르는 결과 연쇄는 횟수를 통해 점점 더 단단해짐으로써 특정 행동을 하면 특정한 결과가 산출될 것이라는 예상, 즉 형성된 믿음애 기반한 기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특정한 행동을 했데도 예상된, 즉 기대하는 결과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거나 심지어 원치 않는 정적인 결과가 자꾸만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그 기대를 접고 다른 행동 결과 도식(schema)을 산출하게 될 것이고 기대하는 결과가 나타나지 않은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가 자꾸 나타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의도한 특정 행동을 멈추게 됩니다. 조금 옆으로 새는 느낌의 극단적인 예를 들면 노동을 통해 먹을 것, 입을 것 그리고 몸 뉘일 곳을 마련하기 위해 노동을 해도 그 실현이 불가능해진다면 그 사람은 당연히 그 노동을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식욕이나 수면욕과 같은 선천적인 욕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까요? 이 질문이 바보 같은 성질인 이유는 당연하게도 생계를 위한 노동이 제 기능을 못하더라도 선천적인 욕구는 없어질 수 없어서 만약 누가 그런 암담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사람처럼 힘이 쪽 빠진 퀭한 눈으로 누워 있거나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에 동의할 수 없는 분들도 계실 텐데 저는 생명력 없는 교조주의적, 그래서 서서히 알게 모르게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어서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타락하게 만들거나 인간의 삶에서 건강한 생명력을 천천히 빼앗아 가는 이타주의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이타적인 속성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선천적으로 완전히 결정되어 고정된 기본적인 본능의 형태가 아니라 처한 현실적 조건들 속에서 소중히 그리고 힘겹게 키워내야 하는 씨앗의 형태인 본능(자연적으로 본래 주어진 능력)으로서 말이지요. 이 말이 실감 나지 않으신다면 한번 이런 상상을 해 보시지요. 아무리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도 사들은 왜 혼자 동떨어져 살지 않고 누군가 옆에 았어주기를 바라는지, 어째서 사람들은 꽤나 긴 세월 동안 인간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을 연거푸 했으면서도 말로는 "이 세상에 사랑 따위는 존재하자 않는다"라고 강변하면서도 여전히 누군가 자신을 마음으로 이해해 주고 옆에서 귀 기울여 자신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기를 원하는 욕구를 내팽개쳐 버릴 수 없는지 말입니다.


물론 이타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신체적으로 다치거나 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를 영혼, 즉 정신과 마음의 상태에 적용해 보면 거찰게 비유해서 치기였을지라도 젊은 날 꿈에 부풀어서 느끼던 생기가 점점 사라지고 주객이 전도된 듯이 돈을 많이 벌어야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생각지 않은 채 그저 어떻게든 악착같이 돈을 벌려고 하고 그래서 정작 꽤나 많은 여윳돈이 생겨도 젊은 날처럼 밝고 환한 꿈을 잃었기에 순간적인, 그래서 금방 싫증이 날 수 있는 말초적인 자극을 받는 데에 그 돈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좀 유치해 보일 수도 있는 질문인 "도대체 나는 왜 사는가?"라는 절박한 질문을 회피하고 잊으려는 헛된 시도를 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릅니다. 


이는 고상한 표현을 쓰면 이른바 "사는 이유" 또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일 텐데 흔히 삶의 의미라고 하면 그동안 외부에서 접한 가치관 때문에 거창하고 드높고 고결한 가치를 상상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인간의 운명상 모여 살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내 문제이자 동시에 남의 문제인 사회적 문제여서 눈길이 가는 문제에서 억지로 눈과 귀를 닫아 버리려고 하지 않을 때 삶의 의미가 우리 자신에게 다가온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처한 상황과 처지 때문에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더라도 이끌리는 관심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즉 개인적인 자신의 문제이거나 사회적 문제임을 인정한다면 그를 억지로 거부했을 때보다는 덜 마음이 들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끌린 관심은 마치 필터처럼 의도치 않게 우연히 접한 대상과 현상들의 어떤 측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이고 어쩌면 때로는 뜻하지 않은 반가운 손님처럼 이른바 "통찰"의 경험을 통해서 스스로의 변화와 함께 철옹성 같은 외부 현실에 작은 균열을 일으켜서 꿈쩍도 할 것 같지 않던 현실의 모습이 미세하게나마 변할 수도 있고 이를 통해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가능성이 흐릿하게나마 눈에 들어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치 힘겹게 산을 오르느 눈길이 잘 가지  못하던 길과 길 옆의 풍경들이 어느 만큼 올라와서 잠시 거친 숨을 고르면서 쉴 때 비로소 눈에 들어올 뿐만 아니라 그만큼 올라왔기 때문에 비로소 보이게 되는, 앞으로 어디로 더 가야 할지를 가늠할 수 있는 길이 조금 더 가까이 보이듯이, 그리고 당연히 처음 발걸음을 뗄 때는 저 멀리 높은 산 봉우리만 보여서 처음에는 어렴풋이 방향만 잡았을 뿐 눈에는 보이지 않던 길이 눈앞에 조금씩 더 생생히 보이면서 어떻게 하면 산 정상으로 향할 수 있는지 점점 더 구체적으로 보이게 되듯이  말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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