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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태진 Mar 12. 2022

이타주의와 유토피아, 그리고 이기주의 (4)

우선 제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7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는 음악을 만들었고 그 이후로는 대학로에 있는 연극 공연장인 학전의 대표를 맡아서 주로 어린이 청소년 극을 무대에 올리고 있는 김민기 씨가 만든 "봉우리"라는 노래의 처음에 나오는 노랫말로 글을 시작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손을 들어 가리키지, 높고 뾰족한 봉우리만을 골라서. 내가 전에 올라가 봤던 작은 봉우리 얘길 해 줄까? 봉우리....  지금은 그냥 아주 작은 동산일 뿐이지만

그래도 그때 난 그보다 더 큰 다른 산이 있다고는 생각지를 않았어. 나한테는 그게 전부였거든"

제가 이 노래의 처음 노랫말을 인용한 이유는 희망, 그것도 흔히들 저 멀리, 이를테면 저 먼 수평선 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 꿈만 같은, 그러니까 이상향을 뜻하는 유토피아가 존재할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기도 하지만 저 너머 까마득히 보이지 않는 곳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이 자리에서 흐릿하게나마 보이는, 또는 지나쳐 가는 바람처럼 잠시 느낄 수 있는 그런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그것도 완전하고 완벽한 조화를 이룬, 성경의 표현을 빌면 "눈물도 슬픔도 없고" 80년대 케케묵은 표현을 빌자면 "그 어떤 착취도 억압도 없이 정의와 평등이 넘치는" 그런 사회에 대한 까마득한 희망이 아니라 매일 같이 자신의 생존과 생계를 위해서 일을 하고 발 디딜 틈 없는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와서 얼른 씻고 늦은 저녁밥을 먹으며 드라마 한 편을 보는 그런 일상 속에서 간신히 찾을 수 있는 여린 희망 말이지요.

 

좀 엉뚱한 질문이지만 만약 인간에게 희망이라는 게, 그것도 마치 바람이 어와서 불안한 듯이 흔들리는 나뭇잎들처럼 불안하고 여린 희망이라도 전혀 없게 된다면 인간은 과연 어떻게 살게 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전에 우선 희망의 근거를 살펴보면 희망은 당연히 현재가 아니라 가까운 또는 꽤나 먼 미래에 대한 성질의 것입니다. 흔한 예로 갓 결혼한 신혼부부가 셋집 신세를 벗어나서 자기 집을 갖는 것, 볕 좋은 주말 바비큐 파티를 하기 위해 이런저런 바비큐 도구들을 싣고 물가에 갈 수 있는 승용차를 사는 것, 자기 자녀가 반에서 공부를 잘해서 상위권에 드는 것, 그리고 그 자녀가 일류 대학에 입학해서 졸업 후 고위 공무원이 되거나 일류 대기업에 들어가고 더 많은 연봉을 받는 윗자리로 승진하는 것 등을 상상해 보면 가슴이 뛰면서 행복한 희망을 잠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행복한 희망은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그러한 상태로의 변화"제로 하는데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그런 희망이 잘못되지는 않았지만 그 사이사이에 단단히 끼어 있는 일상의 삶에는 눈길을 잘 주지 않기 때문에 그 사이사이에 경험하고 느끼는 삶의 결이 그런 행복한 희망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를테면 세를 살면서 속상한 경험을 하거나 자녀가 선생님이나 친구들로 인해 마음을 다쳤거나 직장에서 상사에게 싫은 소리를 들었거나 그 일로 아내에게 화풀이를 하고는 후회하게 되었지만 시쳇말로 쪽 팔려서 제대로 미안한 마음을 표시하지 못한 채 한동안 어색하고 불편한 사이로 살거나 하는 등의 일 말이지요.


갑자기 뜬금없는 말이지만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가 주장한 "쾌락 원칙"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단언컨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유교적인 정신적 태도가 여전히 음습하게 깔려있는 한국사회여서 "쾌락"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뉘앙스가 천박하고 말초적인 성질을 가리키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 단어의 영어 표현은 기쁨을 가리키는 "pleasure"입니다. 따라서 고통은 피하고 즐거움이나 기쁨은 추구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모두가 행복한 사회"라는 막연한 뜻도 지니고 있는 유토피아 사회에서 살고 있지 않은 이상 우리는 처한 현실 속에서 찾고 발견할 수 있는 선택지들 증에 가능해 보이는, 즉 지금보다는 좀 더 나은 상태를 가능하게 해 줄 것 같은 선택지를 취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지금 처한 현실이 전혀 바뀔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현실이어서 아무런 희망도 찾을 가능성조차 없다면 아마도 인간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끔찍한 절망 상태에 빠져서 완전히 자포자기한 채 "인생은 고해일 뿐이다"라는 절망적이고 체념 어린 믿음에 빠져 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되는 은 다른 하위 동물들과는 달리 인간은 왜, 즉 무슨 이유로 물질적 욕구가 적당히 충족되어도 여전히 행복할 수 없을까, 게다가 무슨 이유로 "예쁜 꽃놀이도 하 이틀이다"라는 속담처럼 반복하다 보면 권태로워지는 느낌을 느끼면서도 말초적이기만 한 욕구를 채워서 삶의 권태로움과 헛헛함을 잊으려고 자꾸만 스스로에게 억지를 부리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쩌면 그 아무도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본능으로서의 쾌락 원칙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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