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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태진 Feb 27. 2022

공부, 좋은 대학 입학 그리고 행복과의 관계 (3)

우선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이 한국의 각박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교과서적일 뿐만 아니라 한가해 보일 것이라는 부터 밝히겠습니다. 교육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뜻은 "가르쳐 기르다"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르쳐서 기를 것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되는데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저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때 필요한 지식이나 능력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아직 여물지는 않았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인간적 능력뿐 아니라 소질이라고도 표현되는 고유한 능력도 같이 타고 태어나기 때문에 어떤 특정 분야에는 소질이 있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보통 수준이거나 별 소질이 없이 태어납니다. 그런데 인간이 최소한의 생존 수준을 넘어서 적절한 수준의 삶을 영위하려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물질적 조건들을 충족시켜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타인이 만든 상품이나 제공하는 서비스(용역)를 구매할 수 있는 화폐의 소유가 필수적입니다. 이런 점들을 모두 감안하면 교육은 인간의 적절한 생계유지를 위해서 화폐를 취득할 수 있는 수단을 가르치고 기르게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람마다 타고난 소질이 달라서 모든 과목에 흥미를 느낄 수도 잘해 낼 수도 없음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물론 한의 특별한 조건 때문에 소질이니 관심이니를 따지지 않고 모든 과목에서 매우 우수한 성적을 얻기를 바라는 부모나 당사자인 학생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교육"이라는 단어의 본래 뜻에 비추어 보면 그건 가르치기는 하지만 기른다고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소질이 없고 관심도 없는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다고 할지라도 잠재적인 소질과 관심에 바탕을 둔 성취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그에 대한 동기일 텐데 관심도 소질도 없거나 부족한 상태에서는 본래적인 학습 동기 유발과 상관없이 좋은 성적을 거두려면 거의 유일한 방법은 무슨 뜻이나 원리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조건 죽어라 하고 달달 그 내용을 외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와 관련된 시험이 끝나기 전까지 그렇게 달달 외운 내용이 머릿속에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지요.


좀 상스러운 표현이지만 까놓고 말해서 비단 한국만의 현상은 아닐지라도 부모든 당사자인 학생이든 죽어라 공부만 시키거나 공부하는 이유는 좋은 대학에 입학해서 좋은 직장에 입사하고 그 덕택에 물질적으로 부족함 없이 윤택하게 살게 하고 살고자 함일 것입니다. 우선 이런 태도가 완전히 잘못된 것이 아님을 밝히고 나서 말씀드리자면 인간은 그  본래의 특성상 물질의 풍족만으로 행복해질 수 없는 존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윤택한 삶의 모습을 상상해 볼 때 주로 떠 오르는 장면은 고급 승용차, 널찍하고 고급스러운 아파트, 상당히 값이 나가는 음식을 화려한 인테리어로 치장된 레스토랑에서 먹는 것, 백화점 명품 코너에서 어떤 사람의 반달 치나 한 달치 월급에 맞먹는 고급 명품 옷을 사는 일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유럽으로 가서 이태리 지중해에서 먹음직스러운 연어를 곁들여서  비싼 포도주를 마시며 달콤한 휴가를 즐기는 일 등일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런 삶의 형태를 원칙적으로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저는 그 사이사이 "일상"이라고 표현되는 삶을 산다는 점을 상상해 볼 때, 그러니까 인간인 이상 그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 삶의 모습, 즉 아침에 눈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의 일상이 숨을 거둘 때까지  반복되는 삶을 상상해 볼 때 그렇게 물질적으로 윤택하고 풍족한 삶이 전적으로 인간을 행복으로 이끌 수 있다고는 믿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물질적으로 풍요한 삶을 살더라도, 그래서 남들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사치스러운 삶을 산다 해도 마음속에 저절로 생기는 허무함, 공허함, 권태로움 그리고 삶의 의미 없음 같은 섬뜩하고 불길한 느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청객 같은 이런 느낌은 "텅 비어 있다"는 느낌일 텐데 이 중요한 점은 "무엇"이 텅 비어 있는가입니다.


그래서 다시 교육의 문제로 돌아가서 말씀드리자면 적절한 생존과 생계를 위해서, 그것도 한국의 특수한 교육환경이나  교육조건을 감안할 때 좋은 성적을 얻으려고 노력해야 하겠지만 이와 함께 생존과 생계를 위한 교육만이 아니라 혼자서는 절대로 살 수 없는 인간의 절대적 조건 때문에 나와 능력도 취향도 관심도 다른, 게다가 자라난 생활환경도 다른 남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갓이 아니라 스스로의 잠재적인, 즉 선천적인 사회성을 깨닫고 익히도록 적절한 환경과 조건을 마련해 주는 것도 교육의 중요한 본질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세상에 내동댕이쳐졌다"는 유명한 철학의 명제처럼 어느 날 갑자기 무섭고 위험한 세상에 홀로 내버려진 것 같 몹시 두렵고 절망적인 감정을 느껴서 몹시 무력하고 외로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남들은 아랑곳하지 않 자기만 아는 악성의 이기주의자로 점점 더 타락해서 정신과 마음이 그에 따라 점점 병들어가는 것을 완화하거나 막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육이 마땅히 지녀야 할 목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처음에도 밝혔듯이 이런 말씀이 세상 물정 모르는 한가한 말씀으로 비칠진 모르지만 영어를 잘하고 미분적분 같은 고차원의 수학 공식을 외운 결과 일류 대학에 들어갔더라도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부딪히게 되는 문제를, 그것도 훈수나 둘 수 있는 남의 문제이거나 잠시 머리를 굴려서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라 꽤나 긴 고민과 갈등을 일으키는 곤란한 자기 자신의 문제를 어느 정도라도 해결해야 할 때 일어나는 괴롭고 힘든 자의 마음 상태를 견디려면 사소해 보여서 작아 보이지만 정작 당사자에게는 만만치 않은 곤란한 문제를 직접 견뎌 보아야 정신적 심리적 근육이 조금씩 눈에 띄지 않게 자라날 수 있 것입니다.


그리고 흔한 표현으로 품 안의 자식도 때가 되면 어쩔 수 없이 그 포근하고 안전한 품에서 떠나보내야 하는데 정작 자녀가 그 품에서 떠나더라도 제 삶을 견뎌가면서 스스로 책임지고 살아갈 수 있게 하려면 어느 날 갑자기 안락하고 안전하기만 한 품에서 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꽃 봉오리가 육안으로는 식별할 수 없이 무척이나 천천히 피듯이 차츰차츰 소중한 자녀가 제 발로 서서 자신의 삶을 두렵지만 용기를 내어 책임질 수 있도록 천천히 엄마의 품 속에서 눈에 잘 띄지 않게 떠나보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누구나 겪듯이 사람의 삶이 녹록지도 않고 때론 위험하기도 해서 두렵기도 하지만 마냥 자기 자신의 문제를 회피하면서 도망쳐 다닐 수는 없기 때문에 여전히 두렵고 싫기도 하지만 그런 삶의 문제나 위기에 맞설 수 있는 삶의 "지혜"를 신과 마음에 천천히 익히게 하려면 말이지요.


자주 강조하는 말이지만 자기 자녀가 너무 소중해서 자녀가 실패나 시행착오를 겪을까 봐; 그래서 다치고 우울해지거나 절망할까 봐 때론 몹시 두려운 마음의 상태를 우선 정직하게 인정하면서 자기 자녀의 육체적 성장뿐만 아니라 느리지만 정신적 심리적인 성장을 바란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안을 애써 견디면서 아주 필요한 경우, 그러니까 자녀가 혼란에 빠지거나 어쩔 줄 몰라하면서 외부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부모, 특히 엄마는 자신도 한낱 인간으로서 한계를 지닌 존재임을 인정하면서도 그간 자신이 겪은 실수나 시행착오를 통해 체득한 제한된 경험을 바탕으로 자녀에게 힌트 같은 도움을 줘서 자녀가 그를 바탕으로 다 자신의 문제를 풀려고 마음먹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인정해야 하는 점은 부모, 특히 엄마는 절대로 허구 속의 슈퍼우먼이 될 수 없어서 자녀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고 싶어도 도울 수 없는 난처한 상황에 놓일 가능성이 있기 따문에 그 문제가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라면 자녀의 동의 하에 같이 해결책을 찾아보려고 노력해야 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인간이 행복해지려면 당면한 모든 문제를 (완벽히) 해결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할 수도 없어서 때론 포기하고 때론 그냥 그 문제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을 텐데 이 점을 무시한다면 원치 않게 강박관념이나 강박행동에 걸린 사람처럼 늘 신경을 곤두세우 노삼초사하면서 전전긍긍하게 살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서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처럼 원치 않게 신경질적인 짜증이나 불안을 자주 느끼면서 살아갈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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