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22일 전주 집회 후기를 접한 후의 단상들
2월 15일의 광주 원정은 기사가 날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다른 지역 시민이라도 같은 나라를 공유하며 살아가는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연대할 수 있다는 것, 그런 마음으로 실제 움직이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준 일종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광주로의 연대 원정은 타 지역 집회에 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2월 22일에는 각 지역 사람들이 대전과 전주 집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나는 2월 22일에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함께하지 못했지만, 멀리서나마 소식을 들으며 사람들에게 마음을 보탰다.
개인적인 일을 마치고 쉴 요량으로 들어간 SNS에서 뜻밖의 소식들과 마주하게 됐다. 전주 집회에서 여성혐오적인 가사가 들어간 노래가 나왔다는 후기, 일부 자유발언의 내용이 적절하지 못했다는 후기가 그것이었다. 그 후기들에는 실망했다는 반응과 다시는 해당 집회에 가지 않겠다는 선언이 들어 있었다.
나는 꽤 오랫동안 남양에서 나오는 물건들을 불매하고 있다. 하도 오래돼서 언제부터 불매를 했는지도 까먹었다. SPC도, 쿠팡도 나의 불매리스트에 포함되어 있다. ‘불매’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구매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공동체적이지 못한, 비윤리적인 일을 저지른 기업들은 성명서나 1인 시위, 삭발식, 고공농성에는 대부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가장 확실하게 반응하는 때는 기업의 이익률이 하락했을 때. 목소리를 듣게 하기 위해, 그리고 법이 충분히 해주지 못하는 일종의 ‘징벌’을 하기 위해 등장한 방법 중 하나가 불매였다고 나는 기억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것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 자본주의 사회가 나에게 부여한 ‘소비자 자아’를 최대한 이용해 기업에 타격을 주고, 그런 방식으로 의견을 제시하려는 것이 불매의 목적이었을 것이다.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소비하지 않는 것, 관심이 곧 돈으로 연결되는 관심 경제 생태계에서 관심을 거둬버리는 불매는 이제 일종의 ‘태도’가 되어버린 듯하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기준에서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에서 관심을 거두는 식의 불매를 행한다. 불매는 적극적인 액션이기도 하지만, 매번 그런 것은 아니다. 시간을 들이고 마음을 기울여 함께 바꿔나가야 할 것이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전주 집회에서 등장했던 일부 미성숙한 진행에 관한 ‘다시는 오지 않겠다’는 식의 반응들은, 내게는 다소 ‘소비자 자아로서의 불매 선언’처럼 느껴졌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소비자 자아’라는 말이 왠지 생경하게 느껴졌다. 나는 광장에 어떤 자아로서 참여했었을까? 나는 누구로서 광장에 참여하고자 했었던 걸까? 광장에서 내가 취한 태도는 어떤 것이었을까?
나는 nn년 동안 한 아이돌을 좋아하고 있는 아이돌 덕후다. 이번 계엄 정국에서 화제가 되었던 ‘응원봉 부대’의 일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덕후로서 가장 가슴 설레는 이벤트는 내 가수가 여는 콘서트다. 콘서트 관련 정보가 뜨면 시시각각 기대감이 높아진다. 어떤 노래를 불러줄까? 세트리스트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 연출은 어떻게 할까? 댄서나 밴드 혹은 연출가는 누굴까? 굿즈는 어떤 게 나올까? 혹시 드레스코드 같은 게 있을까? 기대감으로 이어지는 질문과 함께 하루하루를 부푼 마음으로 살게 된다. 나의 아티스트와 그 아티스트를 비슷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팬들과 함께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 고민한다. 이런 기대는 팬으로서의, 동시에 소비자로서의 기대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소비자 자아가 나오는 것이 부적절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집회 현장은 콘서트장이 아니다. 최근의 광장은 민중가요보다 K-POP을 더 많이 틀어주어 2030세대가 친근함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집회 현장이 정말로 즐기기만 할 수 있는 콘서트장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양한 사람이 모이는 장소가 으레 그렇듯, 집회 현장에는 항상 예기치 못한 변수라는 것이 존재한다. 싸움과 충돌이, 상처와 혼란이 나를 흔들어놓을 수 있는 곳이 집회의 현장이다.
화제가 되었던 서울 비상행동의 ‘평등수칙’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명박 정권 때도, 박근혜 정권 때도, 평등과 인권감수성에 관한 이야기는 항상 있었다. 소수자의 삶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자는 의견은 그러나 정권 교체가 우선이라는 의견에 밀렸다. ‘지금 이 시국에 굳이 그 이야기를 왜 하냐’는 비난이 거셌던 시기였다. 여성과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노동자를 비롯한 노동자와 농민들, 학교 밖 청소년을 포함한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뒷전으로 밀려났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계엄령 이후 진행됐던 초기 광화문 광장의 집회에서도 소수자의 이야기는 크고 작은 야유 속에 묻히는 감이 있었다.
확실하게 판이 바뀐 것은 ‘남태령 대첩(1차, 2024.12.21.~22.)’ 이후였다고 나는 느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남태령에 모인 시민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고, 서로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다. 각자의 삶의 좌표가 만나 새로운 입체성을 띤 좌표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듣고 서로를 배웠다. 2024년 12월 21일 밤의 남태령은 존중과 경청의 시공간이었다. 그 이후 광장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며 인사하고, 이웃으로 자각하게 된 소수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는 행위가 일종의 규칙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변화의 흐름을 잘 포착한 서울 비상행동은 기존의 평등수칙을 보완 및 수정하였고, 집회 시작 전마다 평등수칙의 내용을 공지하며 누구에게나 안전한 광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여기에 더해 여성혐오적인 가사가 포함된 노래에는 호응하지 않는 시민들, 연대의 뜻을 담은 깃발과 피켓을 들고나오는 시민들의 노력이 더해졌다. 이러한 노력들이 모여 이명박 및 박근혜 정권 때보다는 훨씬 안전하고, 즐거움과 훈훈함, 자기효능감을 좀 더 크게 느낄 수 있는 광장이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잼컨(’재밌는 콘텐츠‘의 줄임말)’으로 대표되는, 예전보다 비교적 안전해진 오늘날 광장의 모습은, 사실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참여로 겨우겨우 만들어진 것이다. 지역 집회 역시, 시간과 관심을 기울여 함께 만들어야 할 우리의 광장 중 하나다. 그 과정에는 내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좋은 것’만 포함되지 않는다. 소비자 자아에 걸맞은 공간에서는 말 그대로 불매를 하는 것이 옳은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광장이 소비자 자아로서 참여해야 할 공간인가에 관해서는 약간의 의문이 든다. 광장에서 동의되지 않는 모습을 보았을 때, 더 이상 그 광장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충분한 액션이 될 수 있을까? 그 선언은 다음을 도모하고 연결 짓는 생산적인 논의로 발전될 수 있을까?
지역의 한계를 몸으로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지역으로 갈 수도 있지만, 그곳에 남기를 선택한 사람들이 있다. 떠나는 대신 남아 말하고 행동하며 자신이 사는 곳을 어떻게든 바꾸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울에 비하면 집회를 기획하는 사람들도, 참여하는 사람들도 현저히 적어 때로는 기운이 빠지고 허무함이 밀려오지만, 그 현장을 지켜내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도 이야기가 있다고,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계속해 나겠다고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 스스로 목소리가 되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광장에서만큼은, 광장에서만이라도 소비자 자아가 아닌 ‘연대자’라는 자아를 꺼내고 싶다.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연대자라는 자아를 더 단단히, 그러나 유연하게 만들어가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겠지. 연대자는 연루되기로 한 자라고, 감히 생각해본다. 연루된다는 말은 달갑고 좋은 것만 함께하겠다는 말이 아닐 것이다. 시행착오를 함께 겪어나가고 의논하며 길을 만들어가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 그 마음을 실천으로 옮기는 사람을 연루되려는 자, 연대자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나는 광장의 사람들과 얼마나 연루되어 있을까. 연루되려는 마음을 얼마나 실천하고 있을까. 시간과 공을 들여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때로는 버겁더라도, 연루되기를 선택하는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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