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음은 사랑이라는 존엄성의 파괴다. 사랑만이 신비요, 하느님의 계명이며 인간 존재의 본질이다. 사랑이 깨어질 때, 우리는 자기를 잃고 타인을 도구로 전락시키며, 그 영혼은 서서히 말라간다. 말레나(Malèna, 2000)의 침묵과 눈빛, 영화 전체에 흐르는 애조(슬픔이 깃든 정서, 哀調)와 고요한 절망의 분위기, 우리는 눈과 생각을 통해 순결을 잃는다.
가장 약한 부분을 악은 공략한다. 행위와 똑같이 음욕도 죄다. 나는 성사를 밤마다 찾아오는 음욕을 고백했다. 두루뭉술하게 말하지 않고, 이제는 횟수로 성사를 볼 생각이다. 음란죄를 고백하며 해방되고 싶다.
요한 복음을 머리맡 협탁 위에 펼쳐놓고 잠든다. 그것은 나에게 빛이고, 숨이고, 복음의 길이다. 신부님과 수녀님은 동정을 지키지만, 우리 신앙인이라면 동정까진 아닐지라도 마음만은 순결하게 지켜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과 영화 말레나를 감상하고 묵상하며, 나는 이 두 작품이 서로 교차하는 빛과 그림자를 느낀다. 하나는 죄와 자비를, 다른 하나는 아름다움과 고통을 말없이 응시한다. 이 묵상은 나의 고백을 더 깊은 자리로 데려간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속사업에 종속된 마리아의 깨끗한 성심을 사랑한다. 그분의 전구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의탁할 수 있다. 내 어두운 부분이 비추어지기를, 다시 사랑할 수 있기를, 나를 해방시켜주시기를 기도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동성애자에 축복을 주신 일은, 우리가 그들을 교회 구원의 공동체 일원으로서 품고 환대해야 함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교회법적으로 동성 결합을 공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차별과 폭력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주고 보호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임을 말해준다. 교황님은 또한 낙태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여성들과 함께하는 신앙을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여성운동과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를 일삼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칫 예수님의 마음에서 멀어질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배척보다 동행을, 심판보다 자비를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장애인 운동에 헌신하는 내가 또다른 약자를 배척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모순이며 신앙의 부정이다. 하느님을 믿는 천주교 신자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적대한다면, 그 믿음은 그리스도의 얼굴을 닮지 못한 껍데기에 불과하다. 우리가 진정 복음을 따른다면, 가장 작은 이들 안에서 그분을 보고, 가장 낮은 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씀:
"육체의 언어는 사랑의 진리를 나타내야 합니다. 간음은 사랑과 진리에서 멀어져, 자기 자신과 상대방 모두를 해칩니다."
요한 복음 말씀:
- 요한 8,7: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 요한 8,11: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 요한 3,19: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 행실이 악하였기 때문에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마침내, 사도 요한처럼 예수님의 성심에 기대어,
성모님의 옆을 지키는 미카엘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영화 #모니카 #동성애 #간음 #교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