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제도보다 깊다 "탈시설"

신선비 미카엘 생명주일 묵상

by 레푸스
ChatGPT Image 2025년 4월 14일 오후 04_08_19.png

※ 생명주일이란?

가톨릭교회는 매년 5월 첫째 주일을 ‘생명주일’로 지킵니다. 이는 모든 생명의 존엄함을 기억하고, 특히 태아와 노인, 병자, 장애인, 사회적 약자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데 있어 신앙 공동체로서의 사명을 되새기기 위한 주일입니다.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믿음 아래, 인간 생명의 시작부터 자연사에 이르기까지 전 생애의 모든 순간이 존중받고 지켜져야 한다는 교회의 가르침이 선포됩니다.

생명주일은 단지 이념이나 논쟁이 아닌, 고통받는 생명을 향한 교회의 구체적인 사랑과 연대의 날이며,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자비를 실천할 수 있도록 초대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또한 생명주일은 생명의 경계에 선 이들, 예컨대 태아, 노인, 중증질환자, 장애인뿐 아니라 사회의 음지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수많은 생명들을 기억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날을 통해 생명이 얼마나 섬세한 선물이며, 동시에 얼마나 쉽게 지워질 수 있는지를 깊이 새기게 됩니다.


우리 시대는 생명의 문제를 법과 제도의 영역으로 밀어 넣고 있지만, 교회는 늘 그 바깥에서부터 속삭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다.” 이 말 한마디가 오늘의 복음이 되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생명을 말하지만, 그 생명은 종종 조건이 붙은 채로 논의됩니다. 살아갈 능력, 기여할 가능성, 효율과 수익성을 기준으로 생명의 가치를 측정하려는 시대의 조류는, 교회의 목소리로 다시 반전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능력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존귀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잃어선 안 됩니다. 태아의 침묵, 노인의 혼잣말, 장애인의 천천한 걸음, 고통 속에서 나직하게 흘러나오는 숨결까지도 모두가 하느님 앞에서 동등한 영혼임을, 우리는 말하고 또 증언해야 합니다. 생명주일은 그런 침묵의 언어들을 세상 한복판에 가져다 놓는 날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역사에서 그것을 배워왔습니다. 한국 사회가 여전히 복지의 기초조차 세우지 못했을 때, 명동성당의 지하실과 구로공단의 자매 수도자들은 이미 거리로 나가 있었습니다. 1980년대의 노동자 해고와 철야 농성, 그리고 민주화를 위한 기도 속에서 교회는 무력한 이들과 연대했고, 1988년 생활성서사는 그 정신을 ‘삶 안의 복음’으로 구체화했습니다. 제도보다 앞선 것이 사랑이었고, 권력보다 먼저였던 것이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가 한 사람의 존엄을 알아보는 눈으로 이어졌고, 그것이 교회가 교회인 이유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또한 여성의 신비를 간직한 공동체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중보와 고통은 단지 신심의 상징이 아닙니다. 교회는 여전히 여성의 눈물과 노동, 돌봄과 기도를 바탕으로 세워지고 있으며, 오늘날 우리는 이 신비를 더욱 진지하게 묵상해야 합니다. 낙태는 죄입니다. 하지만 그 죄 앞에 선 여성은 가해자이기 이전에 사회의 피해자일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들을 비난하기보다, 품고 씻기며 돌아올 수 있는 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는 성모의 품이자, 성체 안에 담긴 고요한 자비의 품이어야 합니다.


요즘 ‘탈시설’이라는 단어가 많이 회자됩니다. 저는 이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전략이 숨어 있고, 적을 만들어가는 언어의 정치학이 있습니다. 단어를 먼저 선점하는 사람이 의제를 이끄는 시대에, 이 말은 마치 ‘시설’이라는 구조 자체를 악으로 규정짓는 도식으로 작용하곤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이 말을 ‘일부러’ 씁니다. 그래야 그 말 속에 숨은 긴장과 갈등을 드러내고, 교회의 시선으로 다시 묻고 싶기 때문입니다. 단어는 목적이 아니라 시작이어야 하며, 사람을 지우는 말이 되어선 안 됩니다.


얼마 전, 한 시설에서 근육병을 앓던 소년이 선종했습니다. 그 아이는 결코 무연고가 아니었습니다. 시설 관계자들은 정식 장례를 함께 봉헌하며, 그 생명을 하느님께 온전히 맡겨드렸습니다. 저 역시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 소식을 듣고 숨이 막혔습니다.

차마 끼어들 수 없었습니다. 그 삶 앞에서 말이 아니라 기도로 머물고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되묻고 싶습니다. 시설의 직원들은 모두 악합니까? 저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만난 많은 시설 종사자들은 누구보다 성실하게, 생명이 사라지는 자리에 끝까지 함께하며 사랑으로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비판은 필요하지만, 낙인은 안 됩니다. 교회는 그 누구보다 먼저 구조 너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중증 근육병 환자로서,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현재의 탈시설 담론은 대체로 경증 장애인을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습니다. 자립이 가능하고, 의사소통이 가능한 이들의 목소리가 중심이 됩니다. 그 안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이들, 하루에도 여러 번 간병인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의 삶은 자주 잊힙니다. 그런 삶은 때때로 ‘자립 불가능’이라는 명목 아래 논의조차 되지 않습니다. 저는 그런 담론이 씁쓸합니다. 존재 자체로 불편한 통계가 되는 느낌, 사회적 논의에서조차 누락되는 침묵의 무게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1대1 돌봄이 어려운 이유는 단순히 제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활동지원사는 박봉에 시달리고 있으며, 감정노동에 대한 보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이어지는 육체적·정서적 노동에 대한 인식이 없고, 그들을 돌보는 제도 역시 너무나 허술합니다. ‘자립’이라는 말이 이들을 짓누를 때, 그 안에 사는 이들과 그들을 돕는 이들 모두가 무너져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제도보다 사람, 기준보다 생명을 먼저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살아 있음이야말로,

교회가 품어야 할 가장 절박한 복음입니다.

그 복음은 성경책 안에만 있는 문장이 아니라,

호흡기 옆에서 묵주를 쥔 손 안에,

창밖을 바라보며 하루를 버티는 눈동자 안에,

병실과 시설의 고요한 침묵 안에 이미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교회가 다시 살아나는 길은 바로 그 고요를 경청하고,

그 고통 속에 깃든 존엄을 껴안는 데서 시작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말없이 살아내고 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교회를 살리는 생명의 불씨입니다.

이 생명을 향한 예, 이 복음에 대한 응답이

오늘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내가 결혼할 일이 있긴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