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로 오해된 자비》신선비 미카엘

by 레푸스



"천주교 청년이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공부하려고 썼습니다! "


한 시대가 너무 빨리 달릴 때, 뒤처진 사람은 발을 헛디딥니다.

그 시절, 대한민국은 그렇게 달렸습니다.

도시화, 산업화, 그리고 성장.

숫자와 속도가 모든 것을 결정하던 시기.

누군가는 꿈을 말했지만, 누군가는 식사를 말할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그때, 교회가 있었습니다.

빛나는 대형 프로젝트가 아니라,

방 한 칸, 밥 한 숟갈, 눈 한 번 마주침으로 이어지는 복지의 시작이었습니다.


가톨릭은 국가가 복지에서 눈을 감고 있던 시절,

신앙을 이유로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수없이 많은 돌봄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제도도 아니었고, 이익을 위한 활동도 아니었으며,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감당한 사랑의 노동이었습니다.


오늘날, 가톨릭 복지시설의 숫자를 바라보며

마치 숫자만으로 마음의 무게를 재겠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수는 의미이고 곧 목적이며, 구조는 곧 탐욕이라는 식의 단선적 추론입니다.

하지만 숫자는 늘 맥락이 있어야 이해되며, 구조는 본래 사람을 위한 틀이어야 합니다.


시설의 수가 많다는 이유로 사랑을 의심하고, 구조가 있다는 이유로 연민을 회의하는 것은,

그늘에서 피어난 꽃의 뿌리를 따져 묻는 일입니다.

하나의 수치가 사랑의 밀도를 말해주지 못하듯, 건물의 수로 자비의 깊이를 잴 수는 없습니다.

정작 우리가 묻고 들어야 할 것은 ‘왜 그 수만큼의 손길이 필요했는가’입니다.


그 배경보다는 결과만을 근거로 해석하려는 시선이 있습니다.

“시설이 많다 = 조직적인 이익 추구”라는 해석은,

복지의 역사와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판단일 수 있습니다.


물론, 숫자 자체가 질문을 낳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오해는 언제나 맥락이 생략될 때 발생합니다.

특히 복지시설의 수를 역사적 배경 없이 단편적으로 바라볼 경우,

그것은 사실을 왜곡하고, 애초의 돌봄 의도와 사명을 폄하할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지금의 풍요로 과거의 결핍을 너무 쉽게 판단하곤 합니다.

대한민국은 이제 잘 사는 나라가 되었고,

복지 시스템도 점차 자리잡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 지금처럼 제도도 체계도 없던 시절,

교회는 그 빈자리를 조용히 메워왔습니다.


그 당시 가톨릭 복지시설의 숫자는 '많다'기보다는,

'그만큼 필요했다'는 시대의 응답이었습니다.


통계를 바라볼 때에도 주의가 필요합니다.

숫자는 언제나 맥락과 조건의 산물입니다.

단순한 총계로 보이는 수치도,

그 이면에는 사회 구조와 제도적 결핍, 그리고 사람들의 절박한 호소가 함께 깃들어 있습니다.

복지시설의 수는 고정된 수치가 아니라, 그 시대가 남긴 간절함의 흔적이기도 했습니다.


가톨릭 복지의 실천은 단지 제도적 공백을 메운 응급조치가 아니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정립된 가톨릭 사회교리가 있었습니다.

'보충성의 원칙'은 국가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면 개인이나 공동체가 자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보완해야 한다는 사상이며,


'공동선'과 '인간 존엄성'에 대한 확신은 가장 약한 이들을 향한 실천의 토대가 되어왔습니다.

『간추린 사회교리』는 이러한 원리들을 제시하며,

가장 약한 이들의 권리를 지키는 것이 사회 전체의 의무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또한 『모든 형제들』과 여러 강론을 통해,

“형제애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가까운 이의 고통에 반응하는 구체적 선택”이라며

돌봄의 책임을 시대의 과제로 다시 강조합니다.


한 강론에서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복음의 의무”라며,

교회의 진정한 힘은 권위가 아니라, 가장 작은 이들과 함께하는 연대 안에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되묻습니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과연 누구이며,

누구의 고통을 우리의 중심에 둘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숫자들은 단지 과거의 통계가 아니라,

대한민국 복지 발전의 실질적 토대가 되어왔습니다.

장애인 복지, 노인 돌봄, 여성 보호, 자립지원 등

가톨릭 복지시설은 국가가 제도화하지 못한 복지의 공백을 선도적으로 메워왔습니다.


여러 지자체가 천주교 시설을 복지정책의 모델로 참고했고,

일부는 실제로 국가 복지정책으로 전환되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서울시의 탈시설 정책은 민간 주도의 소규모 공동체를 참고했고,

경기도는 장애인 자립생활센터의 틀을 지역 천주교 복지관 네트워크에서 배웠습니다.

또한, 장기요양보험 제도 역시

천주교 요양시설의 운영 경험에서 모델과 기준을 도입한 사례입니다.


이러한 흐름은 교회가 단순한 자선 공간이 아니라,

한국 복지행정 초기의 실험실이자, 제도의 방향을 탐색하던 사회적 시범장이었음을 보여줍니다.


학계에서도 이러한 흐름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가톨릭의 보충성 원칙이 복지국가 문화의 토대였음을 밝힌 연구,

공공성과 지속가능성을 일관되게 실천한 민간 복지 모델로서의 평가,

지자체와 협력한 공공서비스 모델 확산 등

가톨릭 복지의 기여는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따금 “시설이 많다”는 사실만을 근거로,

교회가 복지를 통해 경제적 이익을 추구해왔다는 시각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시설 부자론'은,

현실을 반영하기보다는 선입견과 통계의 오독에서 비롯된 주장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대다수 가톨릭 복지기관은 재정적으로 자립이 어렵습니다.

안정적인 수입 없이 매달 후원에 의존해야 하는 곳이 많고,

지출이 수입을 초과하는 운영이 일상적입니다.


인건비 절감을 위해 수도자와 자원봉사자의 헌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우도 많습니다.

정부 보조금이 있다 해도 운영비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심지어 적자를 감수하면서도 돌봄을 포기하지 않는 시설도 존재합니다.

이러한 현실은, 복지라는 이름 아래 경제적 이익을 추구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생존과 존엄을 지키기 위한 고단한 선택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복지를 통해 부자가 되었다는 질문에, 우리는 이렇게 되묻고 싶습니다.

'부자'란 무엇입니까.


지출이 수입을 넘는 복지기관을 향해, 헌신을 수치로만 판단하며, 기도의 손길을 장부의 행으로 바꾸는 그 시선은 과연 무엇을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까.

만약 가톨릭 시설이 진정 '부자'라면, 그것은 돈이 아니라 사람의 온기로 채워진 '부(富)'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는 숫자가 아니라, 손잡은 시간과 고개 숙인 날들로 셈해야 할 것입니다.


사회정의란 '더 많이 가진 자가 더 많이 나눠야 한다'는 단순한 윤리를 넘어서,

모든 인간이 존엄하며, 사회는 그 존엄이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을 구조적으로 마련해야 한다는 요구이기도 합니다.


'공동선'이란 단어는 그저 개인의 선의가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구축해야 할 조건이자, 정의로운 제도의 방향성을 말합니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공동선을 '모든 이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 구조'로 정의합니다.


이 개념은 개인의 자선이나 시혜를 넘어, 복지가 '책임 있는 사회의 조직 원리'임을 분명히 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제3부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단순한 동정이 아닌 정의의 문제이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은 교회의 전통적 소명"이라 천명합니다(교리서 2448항 참조).

이는 복지가 신앙의 부차적 열매가 아니라, 복음적 삶의 본질임을 교회가 일관되게 가르쳐온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가톨릭 복지시설이 쌓아온 부(富)는 재산이 아니라 연대였고, 권력이 아니라 책임이었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부는 자신만을 위해 모이는 것이 아니라, 공동선을 위해 사용될 때 비로소 정의롭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가난한 이는 당신의 헛된 지출보다 먼저 고려되어야 할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설교했습니다. 성 암브로시우스 역시 "부유한 자의 창고에는 가난한 자의 빵이 있다"며, 부의 사회적 책임을 강하게 역설했습니다.


교부들의 이러한 가르침은 단지 개인의 도덕을 넘어, 사회의 구조가 가난한 이를 기억해야 한다는 복음적 요청으로 이어집니다. "부는 자신만을 위해 모이는 것이 아니라, 공동선을 위해 사용될 때 비로소 정의롭다"고 말했습니다. 이 정의로운 부의 개념은, 복지를 통한 ‘획득’이 아닌, 복지를 통한 ‘나눔’과 ‘책임’에 기반한 부를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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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세속적 도덕이 '선의의 실천'에 초점을 맞춘다면, 가톨릭 교회의 가치는 그 실천이 구조와 제도를 통해 지속될 수 있도록 책임지는 데까지 나아간다는 차이를 보여줍니다.


가톨릭은 인간의 선의에 기대기보다, 제도적 사랑—곧 구조적 정의와 공동선의 구현—을 신앙의 실천으로 받아들입니다. 도덕적 감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공동체 전체가 복지와 정의를 구성해나갈 책임이 있다는 사회교리의 핵심을 반영합니다.


이제 다시 묻습니다.

그들은 복지로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복지를 통해 '사람'을 지켰습니다.

돈이 아니라, 존엄을 벌었습니다. 숫자는 말하지 못합니다.

한 사람의 이름과, 그가 맞은 아침을.


지금, 우리가 되묻고 싶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 마태 2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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