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삶에 깃든 거짓 평화

by 레푸스


평범한 삶에 깃든 안온한 평화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바이며, 지극히 당연한 일상의 조건일 것이다. 나는 그것을 ‘평범’이라 부르며, 계획하지 않아도 되는 목적의 바깥에 존재하는 최소한의 인간적 지향이라 생각한다. 평범함은 욕망의 끝이 아니라, 더 이상 욕망하지 않아도 되는 마음의 자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사안일은 이와 다르다. 평범한 삶의 가장 큰 함정이 있다면, 그것은 ‘거짓 평화’ 일지 모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머무는 안락은 때로 영혼을 무디게 만든다. 그 평온이 진실한 평화가 아니라 깨어 있기를 두려워하는 무감각이라면, 자기기만의 한 형태다.


무신론자가 호모 사피엔스를 정의한다면 뇌의 주름과 뉴런이 아니라 사랑을 말할 것이다. 사랑은 인간 신비이자, 과학이 측정할 수 없다. 모성의 온기, 의로운 희생, 측은지심과 자애의 행위는 어떤 물질적 단위로도 잴 수 없다. 그것은 지구의 심해처럼 깊고, 팽창하는 우주의 끝처럼 멀며, 빛의 속도로 달려도 도달할 수 없는 미지다.


나는 평범한 삶 속에 숨어 있는 ‘무의지의 폭력’을 말하고 싶다. 천주교인으로서 신의 이름으로 부활을 외치며 살아가면서도 사랑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무엇을 믿고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 참된 평범은 무감각이 아니라, 사랑의 깨어 있음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때 비로소 일상은 성화(聖化)의 시간이 된다.


율법과 함께 권위가 우리를 폭력과 교만으로 이끌 때, 치료약은 오직 사랑의 회복뿐이다. 삶을 배운 대로만 사는 ‘학문형 인격’은 사랑을 배척하며, 오직 구조적 공간과 논리적 운동 등의 산물만을 배출할 뿐이다. 사랑 없는 학문은 차가운 구조물일 뿐이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앎이 아니라, 사랑의 깊이에서 비롯된 깨어 있음이다.


평신도나 사제나 신학자나, 율법과 권한이 앞서면 구원은 동화책처럼 여겨지는 위험이 생긴다. 세상에 완벽한 신앙인은 없다. 사실 이단의 속성은 ‘강인함’과 ‘완벽함’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패배란, 자신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성인이 되고 싶지 않다는 완고한 고집 속에 있다.


2027년, 세계청년대회를 맞아 가톨릭 세계의 젊은이들이 서울에 모인다. ‘성인이 되고 싶다’는 열망을 사랑 안에서만 가능한 희망으로 승화시켜, 한국 천주교만의 특별한 신심으로 삼길 바란다. 그리하여 제2의 카를로 아쿠티스와 같은 젊은 성인이 태어나길 진심으로 기도한다.


나는 나 자신과 청년들이 자기의 평화에 안주하느라 지워진 이웃들의 이름들에게 용서를 청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활의 삶을 살기를 하느님께 삼가 기도드린다. 이것이 희망을 뜻하고 인류 소생의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인류를 계속 못 박았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자신을 못 박는 구원의 나눔이었다. 무관심이란 곧,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느님께서 너무나 사랑하신 인류와 외아들을 다시금 못 박는 일이다.


(2025년 10월 4일. 신선비 미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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