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사피엔스, 희망
직접 키보드를 사용할 수 없어 화상 키보드로 입력하다 보니, 작문이란 행위가 늘 버겁다. 손으로 필기를 할 수 없으니 노트를 통한 학습의 이점도 누릴 수 없다. 자료를 수집하고 가공하며 공부하는 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장애다.
그럼에도 나는 두 달 동안 가톨릭평화신문 연재를 마치고, 생활성서 기고까지 무사히 써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든 과정을 나조차 선명히 회상하기 어렵다.
이것은 불만이라기보다, 글이라는 노동의 시간과 체력의 측면에서 건강한 사피엔스보다 훨씬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의 고백이다. 긴 문장을 완성하기까지의 지루함과 소모는 내게 단순한 피로가 아니라, 한계를 뚫고 나아가는 빛과 색깔이다.
나는 직립보행도, 손끝으로 생각을 기록하는 지적 운동도 하지 못하는, 어쩌면 반(反)진화적 인간이다. 그러나 모든 고전의 비극이 그렇듯, 내 사지 근육의 불구와 인공호흡기의 숨결 속에서도 나는 인간이 추구하는 의제와 창조의 의미를 조금도 놓을 생각이 없다.
나는 여전히 ‘쓴다’는 행위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고, 사피엔스의 불완전한 진화 속에서 또 하나의 돌연변이로 살아간다.
질병은 나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그것을 통하여 인류가 진화하게 한 돌연변이의 한 사람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원과 자비의 집에서 고통을 찬미하고 예찬하는 승리자다.
내가 서적을 읽고 성경을 독학하는 까닭은 단지 지식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천주교 신자로서 책을 집필하는 이가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며, 나의 영성을 회개를 넘어 희망으로 이끄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으려 한다. 신앙이란 오체불만족과 과거에 묶이거나 자신을 변호할 뿐인 묵은 포도주가 아니다. 언제나 새롭고 향기로운 포도주로서 삶을 통하여 봉헌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성경 때문에 말씀에 냉랭해지고, 경외도 사랑의 신비도 만나지 못한 채, 아이러니 속의 위선자가 되고 말 것이다.
비극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을 선택할 것인가.
그 선택은 전적으로 자기 앞에 놓인 희망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