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너에게 가는 길
“어? 어! 너 죽은 거 아냐?”
“무슨 소리야? 내가 왜 죽어?”
“너 학교에서 안 보여서 죽었다고 소문났어.”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쉬는 시간 복도에서 만난 동네 친구는 나를 보며 깜짝 놀라 물었다. 내가 죽었다니, 친한 친구의 입에서 나온 말 치고는 너무나 끔찍한 말이었다. 5학년 때의 나는 무척 예민한 아이였다. 엄마가 아침에 머리를 곱게 묶어주면 머리카락 한 톨 올라온 꼴을 보지 못했다. 내 머리카락 모양이 태초부터 그렇게 생겼음에도 허용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은 세수를 하고 나오려는데 비누가 거슬렸다. 삐뚤어진 비누가 거슬리는 것이 아니라 처음 모양대로 놓여지지 않은 비누가 거슬린다. 모든 물건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내가 보았던 처음 상태로 돌려놓아야 직성이 풀렸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에 신경이 곤두세워질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부터 배가 아프면서 먹는 대로 설사를 하기 시작했다. 설사가 잦아지면서 혈변을 보는 경우도 있었다. 병원에 가보니 신경성 장염. 5학년 여자아이에게 도통 어울리지는 않을 병명이다. 주기적으로 병원을 다니면서 조퇴하는 날이 많아지고 다른 반 친구들과도 마주칠 일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그런 소문이 돌은 모양이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내 나이 11살에 죽었다는 소문이 돌다니!
그 시기 배앓이가 너무 심해서 나 스스로 살기 위해서라도 예민함을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의도적인 둔함을 택하기로 했다. 거슬리는 물건들이 보이면 눈을 딱 감아버리고 최대한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게 무뎌지는 연습을 하자 병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 예민함이 그리워진다. 세세하게 하나하나 신경 쓰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이 머리에 깊이 박혀버려 어쩌면 조금은 무디고 무관심의 태도로 살아온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 일에 적당히 끼어들자. 여기까지만. 나 스스로 범위를 정하고 그 이상을 나아가지 못해서 공감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얼마 전 모임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예민함에 대해 부정하고 거부한다는 걸 알았다. 예민한 것이 정말 나쁜 걸까? 살면서 조금의 예민함은 필요할 수도 있다. 예민한 촉을 살려 상대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도 하고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일에 관심을 보일 수도 있다. 특히나 요즘같이 매일 글을 쓰고 있을 때는 그 예민함이 절실하다. 일상을 평범하게 바라보지 않는 촉, 평범함 속에서도 보석을 캐낼 수 있는 감각이 바로 예민함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림책 『마음샘』에서는 목이 말라 물을 마시러 간 늑대가 샘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이 토끼라는 사실에 깜짝 놀란다. 무서운 겉모습을 지니고 살아왔는데 사실은 여린 토끼의 마음을 가진 늑대라는 사실이 알려질까 안절부절 하지 못한다. 그래서 토끼에게 겁을 줘 쫓아버리려고 했지만 매번 실패하자 다른 동물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숨어버린다. 맑은 샘은 자신의 마음이 비추어 보이는 마음샘이었다.
나는 처음 늑대가 맑은 샘을 발견했을 때의 장면이 마음에 남았다. 나뭇잎이 비춰진 맑은 샘이 언뜻 보기에 큰 구멍이 난 것처럼 보였다. 그 구멍을 보며 어쩌면 내 안의 토끼를 들키지 않기 위해 스스로 파놓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꼭꼭 숨겨두어 그 안에 토끼를 넣은 것조차 모르고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도 희망이 있다. 내 천성이 예민한 사람이었는데 둥글게 살아왔다면 내 마음 어딘가에 깊게 파여진 구멍 속에 나의 예민함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 구멍을 찾아 예민함을 끄집어내기만 하면 된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받는 요즘이다. 예민하고 감정적인 내 모습이 그토록 싫어서 숨기고 버리려 했던 나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모습을 그리워한다. 많은 사람들이 열을 올리는 ‘나찾기’란 내가 몰랐던 나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렸던 나를 찾는 것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릴 때 다투고 헤어진 오랜 친구처럼 토라진 예전의 나에게 화해의 손길을 건네는 것. 그것이 나찾기의 본질이다. 살다 살다 예전의 내가 그리워지게 될 줄이야.
내 안의 또 다른 나, 내면 아이를 만나서 상처 받았던 어릴 적 나를 토닥여줘야 마음의 치료가 된다고 들었다. 어떻게 하면 내면 아이를 만날 수 있을까 궁금했다. 어릴 적 나에게 큰 상처가 되었던 사건이 있었던가. 그 자리에 남아서 울고 있는 내면 아이가 도대체 어디 있는지 어딜 가면 만날 수 있는지 그 방법조차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 알게 되었다. 나의 내면 아이는 잃어버린 나였다. 나에게 많은 영향을 끼쳐 원망의 대상이 되었던 엄마가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버림받아 상처 받은 나. 내가 나를 부정하며 꼭꼭 숨겨 버렸던 내가 그곳에 있다. 그 깊고 깊은 구멍 속에서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언제쯤 다시 손을 내밀진 않을까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쳤으리라. 지금의 이 과정은 결국 잃어버린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 곧 널 만나러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