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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몽 Dec 01. 2020

버텨내기의 기술

느림의 미학

올해 2020년은 참으로 빨리도 흘러가버렸다. 오늘이 벌써 12월의 첫째 날이다. 생일을 맞은 오랜 벗에게 생일 축하 인사를 건네며 “벌써 이렇게 되었네”라고 말을 덧붙였다. 올 한 해 내가 이리 최선을 다해 살아본 적이 있던가 싶을 정도로 열심히도 살았다. 코로나로 인해 죽어버린 해라고도 말하지만 세상이 멈추어 서는 바람에 내가 한 발자국이라도 뗄 수 있었다. 밖이 너무도 소란스러워 세상과 등지고 살던 나조차도 문을 열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혼란스러운 모습에 나 또한 혼돈으로 시작되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것이 참 신기하다. 단단해지고 또 단단해지는 연습을 한다. 처음 마주한 내가 알지 못했던 세상에 무릎 꿇고 좌절하며 눈물을 참지 못했던 그 시절이 참으로 까마득하다. 목적지도 모른 채 앞서 달려가는 사람들 무리에 끼어들어 여기까지 왔다. 남들 다 쉽게 다음으로 넘어가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내게만 보이는 거대한 유리벽이 있는 것 같았다.


첫 단추가 중요하듯 첫 좌절을 눈 감고 버텨냈더니 그 이후로는 버텨내기가 수월해졌다. 버틴다는 것은 남들의 시선에 더해 나의 시선까지 견뎌내야 한다. 타인은 그저 스쳐 지나갈 수 있지만 또 다른 나의 경멸적인 시선은 나를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버텨내는 연습을 했다. 이것만 버티자. 다음은 시작도 하지 못할지언정 이번만 견뎌내자.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는 꾸준히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변덕 심하고 누구보다 포기가 쉬었던 내게 언젠가부터 꾸준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더해졌다. 나는 정말 꾸준한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습관처럼 내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 이 글도 쓰고 있는 것이다. 나는 꾸준한 사람이니까.


내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하나만 이겨내고자 노력을 해본다.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지 말고 버텨낼 수 있을 것인가에 집중하다 보면 세상 복잡했던 일도 단순해진다. 그 순간 다른 사람들과 나와의 목표점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들은 몇 번째로 골인하느냐가 중요하겠지만 나는 골인만 하면 그만이다.









미안 글, 그림ㅣ웅진주니어




그림책 『나씨의 아침 식사』에서는 아침 식사로 만두 네 알을 먹기 위해 하루가 꼬박 걸리는 나씨가 나온다. 나씨의 등장부터 예사롭지 않다. 페이지 한쪽 귀퉁이부터 시작해서 온전한 모습을 보이기까지는 몇 페이지를 넘겨야 한다. 바라보는 사람의 속 터짐을 유발하는 나씨는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아침식사를 먹기로 했고 해가 져서 먹게 되었다 해도 아침식사는 아침식사인 것이다.



나는 슬로우라이퍼를 외치며 느림을 추구하는 사람이지만 사실은 엄청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아이가 한 단어 한 단어 생각하고 고르느라 더듬더듬 말하는 시간조차 기다리지 못하고 내가 먼저 말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글 타자는 기본 400타. 급한 성격에 빨리빨리 처리해버리는 탓에 항상 일복이 많았다. 그랬던 내가 느림을 외치는 사람이 되었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고 싶어서 중간과정을 견뎌내기 힘들어했던 내가 하나하나 그 과정을 즐기고 있다. 이것들이 쌓여서 내가 단단해져 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 가나’가 아닌 ‘언젠가 가겠지’라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다 보니 올 한 해 끝자락에 도착해 있다.


12월의 시작 날, 2020년 마지막 달은 어느 때보다 더 느리게 천천히 지나갔으면 한다. 올 한 해 수고했다고 애썼다고 다가오는 2021년의 설레임보다는 아직은 지난 열한 달을 추억하고 싶다. 지치고 지쳤던 2020년이었지만 누구보다도 그 어느 때보다도 최선을 다했고, 참으로 열심히 살아왔다. 그래서 후회 없는 2020년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을 한 해였다.


참 아팠지만 행복한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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