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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몽 Jan 21. 2021

결국 내 곁엔 가족뿐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기록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면 나는 아무것도.라고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음식점에 가서 주문을 할 때도 뭐 먹을래?라고 물으면 아무거나.라고 말하는 사람이 나이다. 전혀 나만의 취향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남들 사는 대로 따라가기 바빴다. 지금의 나는? 좋아하는 것들 투성이다. 아니, 좋아했던 나를 발견해가고 있다는 것이 더 어울리겠다.


나는 유난히 밤하늘의 별에 집착하는 편이다. 여행을 즐겨하지는 않지만 여행을 가게 될 일이 생기면 먼저 그곳에 천문대가 있는지 찾아본다. 스물세 살 첫 직장에서 맞이한 겨울날 워크숍으로 스키장을 간 적이 있다. 20대의 신입사원 셋이서 밤새 술을 마시다 술이나 더 채울 겸 밖을 나섰는데 커다란 별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았다. 손바닥만 한 별들이 바로 내 머리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하면 백발백중 취했네!라고 말을 한다. 그때의 기억이 뇌리에 박혀 밤하늘의 별을 찾아보는 것이 하나의 습관이 되었다. 그 이후 그만큼의 커다란 별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었다. 8년 전이었나.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친구들 넷이 어엿한 가족을 만들어 아홉이 되어 무주로 떠났던 때가 있었다. 산속 깊은 곳이라 그런지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원 없이 보고 왔더랬다.     


CG가 아닌 실사


그날 밤 무주의 밤하늘이다. 별자리에는 까막눈이면서도 별 보는 건 참 좋다. ‘별들에게 물어봐’라는 말은 괜히 나온 건 아닌 듯하다. 별을 보면 자꾸 말을 걸게 된다.



내가 우울할 때마다 하던 행동들이 있다. 지금은 아이들이 24시간 5분 대기조로 나를 붙잡고 있어서 할 수가 없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그 행동들이 나에게는 살기 위한 숨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겠다. 나는 무언가 답답하거나 마음이 풀리지 않을 땐 일부러 바닥을 찾아 내려간다. 바닥으로 내려가기 위해 세상 슬픈 노래를 찾아 듣고 서운했던 말들을 곱씹으며 감정을 끝까지 차오르게 한다. 눈물샘이 터져버리면 바닥으로 내려가기는 수월해진다. 이불을 부여잡고 입을 틀어막다가 가슴을 치며 소리 내어 울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내가 왜 울기 시작했는지 잊을 때도 있다. 한바탕 의식을 치르고 나면 세상 개운하게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든다. 바닥을 치면 그 반동으로 올라오기도 쉬워진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는 내게 그런 호사로움은 주어지지 않는다. 이불을 부여잡을 새도 없이 아이들이 등 위로 올라타고 조금이라도 눈물을 보이려고 하면 나보다도 먼저 울어주는 아이들이 있다. 가끔은 말 못 하는 세 살 아이가 엄마를 꼬옥 안아주며 토닥여주기도 한다. 다 풀지 못하고 쌓여만 가는 가슴속 비밀 창고가 생겼지만 덕분에 나를 일으켜주는 새로운 비타민도 생겼다.


너무 피곤한 날에는 큰 아이를 붙잡고 엄마 좀 꼭 안아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러면 아이는 익숙하다는 듯 내 품에 와서 꼭 안긴다. 그러면 나는 아이의 살을 부비고 살 냄새를 맡으며 안정을 찾는다. 특히나 첫째는 초짜 엄마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줘서 그런지 묘하게 의지가 된다.


추운 겨울에도 겉옷을 벗는 굳센 아이들


우리 집에 사는 신박한 똥강아지들의 모습이다. 아이들 때문에 정신을 잃기도 하고 정신을 차리기도 한다.


나는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고 정 또한 주지 않아 곁에 사람을 잘 붙이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럼에도 신랑과는 9년을 연애하고 8년째 함께 살고 있다. 첫 번째 사춘기가 왔던 스물다섯 살부터 그와 인연을 맺고 있다. 연애 3년 차까지는 1년에 한두 번씩은 이별을 고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꿋꿋이 잘 버티며 나를 붙잡아줬다. 3년이 지나가니 나도 포기가 되고 가족 같고 그러더라. 매사 부정적이고 회의적이었던 내가 그를 만나 웃음을 찾고 초긍정주의자였던 시절도 있었다. 9년이나 연애를 했기에 결혼생활 또한 연애의 연장선일 줄 알았으나 뭐가 문제였을까. 지지고 볶고 열심히도 싸우며 살아왔다. 9년 연애를 할 때도 싸움 한 번 한 적 없던 우리였는데... 가끔 연상연하 커플이 나오는 드라마를 보면 괜스레 마음이 설렌다. 평생 연애하는 기분으로 살고 싶다며 결혼을 해도 여보, 당신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8년을 살아온 지금까지도 우리의 호칭은 ‘자기야’다. 그렇지만 예전의 달달함은 많이 사그라들었다. 그에게는 가족의 책임감이 내게는 육아의 숨 막힘이 자리 잡고 있다.   




신혼 때 친구들과 여행 갔을 때 아침 산책하던 우리의 모습을 친구 남편이 찍어줬더랬다. 우리는 어디서든 두 손을 놓지 않았다. 지금은 우리 사이 아이 둘만큼의 거리감이 생겼더라도 우리에겐 예전엔 없던 새로운 감정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끈끈한 전우애.



서른다섯 살, 신랑 생일을 기념하며



우리 넷이어서 완전해질 수 있었다. 소소한 보통의 날들을 우리 함께 기록해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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