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빛나는 순간
내 인생에서 가장 반짝이던 순간들은 언제였을까. 인생그래프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 3가지를 찾아보았을 때 나는 순간 당황했다. 내 인생 그래프 중 가장 높았던 지점이 내가 생각했던 순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인생그래프에서 가장 높은 지점은 26살, 신의 직장이라 불리던 공공기관에 취업했을 순간이었다. 그곳에 입사하는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SKY대 출신이거나 유학파였다. 그런 대단한 곳을 내가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전혀 의도치 않았기 때문이다. 23살 첫 직장을 비서직으로 시작한 나는 공무원 준비를 하면서 생계비나 벌어볼 목적으로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공공기관에 알바로 지원했다. 우리나라에 그런 곳이 있는지도 몰랐을뿐더러 단지 집에서 가까워 걸어 다닐 수 있어 차비조차 들지 않는 곳, 일이 없을 때는 개인 공부를 해도 된다는 조건만 찾아보았다. 내가 처음 지원한 곳은 한 부서의 서무 알바였다. 나이도 적지 않았던 내가 20대 초반 대학생들과 겨루기엔 부담스러웠을 거다. 면접을 보았지만 탈락이었다. 나는 그곳의 조건이 너무 아쉬워 담당 직원에게 메일을 보냈더랬다. 내가 왜 불합격인 건지 이유를 알려준다면 다음 지원에 큰 도움이 될 거 같다고 말이다. 물론 답장이 올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직원이 참으로 마음씨가 좋았나 보다. 아주 친절하게도 나보다 더 빨리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지원자가 있어서 그 친구를 뽑았다고 메일을 보내왔다. 아, 다음엔 당장 시작할 수 있다고 써야지. 한 가지를 배웠다 생각하며 아쉬움을 뒤로 했다.
2주 정도 지났을까. 그곳 총무팀에서 전화가 왔다. 급하게 아르바이트생이 필요한데 모집 글을 올릴 시간조차 부족해서 가까운 시기에 알바를 뽑았던 부서에서 추천을 받았다고 한다. 메일을 보낸 내가 인상적이었던지 그 직원은 나를 추천했고 면접을 본 후 바로 채용되었다. 일은 참 간단했다. 공공기관이라 TV에 나오는 정치계 위원들이 6명 계셨고 회사에 상주하는 분들은 아니기에 위원들이 나올 때만 위원실에 올라가 비서 업무를 하면 되었다. 전체회의는 1주일에 한 번이었다. 그리고 위원들이 나오는 날에만 올라가면 되는데 거의 그럴 일은 드물었다. 그 외의 시간은 총무팀에서 내 볼 일을 보면 된다. 완전 꿀직이다. 비서 경력이 있어서 비교적 수월하게 진행되었던 거 같다. 위원들의 임기는 3년이었다. 고로 3년은 아르바이트생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3년이나 공무원 준비를 할 생각은 없었지만 일을 하다 보니 이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아르바이트비 치고는 금액도 나쁘지 않았고 위원을 모시는 비서라 품위유지비로 돈을 더 얹어주었다. 게다가 알바로 들어갔지만 2년이 넘어가자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도 해주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럴듯한 직장에 비서직이라 일반 직원들과 부딪칠 일도 없고 위원실에 있으니 상대하는 사람은 임원급이다. 위원실 밖에 내 자리가 따로 마련되어 있어서 내가 할 일만 하면 무엇을 해도 좋을 자리였다. 준공무원급 복지가 보장되었기에 굳이 힘든 공부를 하며 공무원 시험을 볼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곳에서 안일하게 20대의 중반을 보내고 있었다. 인생그래프에서 이 순간을 가장 높게 찍은 건 그때가 가장 화려하고 행복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화려함 뒤로 미친 듯이 곤두박질치고 나서야 그나마 그때가 좋았구나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높은 지점은 기억의 시작인 6살 때다. 지금 생각해보면 딱히 좋을 날도 없었지만 그래서 좋았던 거 같기도 하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평범한 날들.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어딘가에 놀러 가 사진을 찍던 모습. 세상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내가 전부였던 그때, 아무 걱정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던 그때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옆 집 사는 친구가 6살에 한글을 읽어 엄마한테 혼나기 전까지 어릴 적 기억은 매일매일이 풍요롭고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마지막 빛나는 시기의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이다. 작년 마흔 살 심한 우울증을 극복하고 올라와서인지 앞으로의 길이 이대로 쭈욱 상승세일 것만 같다. 수많은 점들이 오르락내리락 같은 자리에서도 쉼 없이 움직이고 있다. 그 점을 이으면 곱고 매끈한 선처럼 보이는 것일 뿐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치열함은 쉽게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누구나 찬란했던 시절은 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화양연화라고 부른다지. 내 인생의 화양연화가 언제냐고 물어본다면 당연히 아직 만나지 못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지나온 날들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단 한순간도 없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수없이 많아서 하나만 고를 수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20대의 안일했던 삶에서 지나친 욕심 끝에 사업에 도전하여 실패했을 때가 있었다. 실패라고 낙인찍히기 전까지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매일 밤을 지새우는 것이 너무도 좋았다. 그 일을 성공시키지 못해서 빚더미에 앉아 그 시절이 악몽으로 돌아섰지만 그때의 기쁨은 여전히 가슴 한 켠에 남아 있다. 사업에 실패하고 돈이 없어서 도망치듯 9년 만난 그때의 남자 친구와 결혼을 했다. 내 인생그래프에는 결혼의 순간도 적어내질 못했다. 제2의 인생이 시작되었지만 낙오자로서의 대피처일 뿐 기뻐할 새도 없었다. 하지만 내 생에 단 한 번이었던, 9년의 기다림 끝에 이루어낸 결혼식이 과연 행복하지 않았을까?
작년부터 나를 찾겠다며 지금까지 3번 정도의 인생그래프를 그린 듯하다. 처음 그렸을 때는 이런 것까지 써야 하나 싶은 마음으로 그려냈고, 두 번째 그릴 땐 나의 잃어버린 조각들을 찾겠다며 기억을 모아 점을 찍었다. 마지막 세 번째 인생그래프는 굵직한 것들만 표시를 하게 된다. 이제 나의 인생그래프는 과거가 아닌 미래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 내가,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방황을 마치고 돌아온 내가 참 대견하기도 하다. 나의 화양연화는 지나온 순간마다 있었고 앞으로의 순간마다 만나게 된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너와 함께 한 모든 시간이 좋았다’는 도깨비의 대사처럼 나 또한 내가 지나온 모든 시간이 좋아졌다. 그 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고 지금의 내가 더 꽃 피울 내가 됨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