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이 건네는 위로들, NOOK

제주 한달살이 - 14

by 다온

제주도에 와서 세운 계획 중 하나는 너무 많이 돌아다니지 말자-였다.

도장 찍기 하듯 돌아다니느라 바빴던, 남는 게 정말 사진뿐인 여행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제주도의 맛집을 가는 대신 10분 거리의 마트에서 재료를 사서 해 먹었고, 수많은 멋진 카페들을 뒤로하고 스벅으로 향했다.


그러다 어쩌다 찾게 된 한 북카페. 원래는 3시간 예약제로 운영하고 있었으나 카페로 바뀌었다는 그곳에 눈이 갔다. 2층을 개조해 만든 그곳은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공간에 있는 나를 상상하게 했다. 그렇게 찾은 곳이 함덕에 있는 카페, 아이러브눅이다.


공간을 보면 사람이 보인다고 했다. 오래된 원목 가구들과 취향대로 큐레이션 된 빛바랜 책들, 바깥이 훤히 내다 보이는 통창과 1인 소파들. 소리라고는 책장 넘기는 소리, 조용한 재즈음악, 커피 기계음. 소란한 세상에서 소음을 비우기 위해 애썼을 젊은 부부의 하루가 눈에 선했다.


분명 일을 해야 했다. 내 투두리스트에는 수많은 계획들이 있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 어쩌면 이곳에 오기 전에 오늘의 일은 제쳐두기로 결정했는지도 모른다. 아주 오래된 나의 고질병.


난 늘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고민을 하다가 후자를 택하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칼로리를 생각하면 아메리카노를 먹어야 했지만, 따뜻한 카페모카를 시켰다. 세상을 보려면 신문을 읽는 게 맞다지만 내 손은 소설책이나 시집을 골랐다. 일을 하려면 사무실로 향해야 하지만, 난 제주도의 작고 아늑한 서점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명분은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이런 공간에서 경제경영 책을 읽는다는 건 그야말로 죄악이 아니겠는가. 아쉬운 게 있다면 이런 곳을 제주 한달살이 막바지에야 만나게 됐다는 것.


결국 우리는 제주의 마지막날 그곳을 다시 찾았다. 문을 열자마자 만난 그곳은 색다르다. 늦은 오후에는 나만 아는 술 없는 와인바 같은 느낌이 났다면 오전에는 할머니네 집에 생긴 작은 교보문고 같달까. 왜 교보문고냐고 묻는다면 무향의 공간에서도 보이는 향이 느껴진다. 책과 풀이 어우러진 냄새.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사정을 안고 온다. 100명의 사람이 이곳을 찾는다면 표면적인 이유는 같을지 몰라도- 적어도 100가지의 이야기는 나올 터. 그림 방명록엔 그런 그들의 이야기가 빼곡히 적혀 있다.


60살에 처음 이런 곳을 경험했다는 한 중년 여성, 직장에서 15년간 퇴사하고 와서 앞으로 뭘 해야 할지 고민이라는 사람, 이곳에서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는 이. 자기만의 길을 찾기 위해, 답을 찾기 위해, 시간을 찾기 위해 서성이는 이들.


"약해지자"

그 안에서 내가 찾은 메시지. 너무 강한 건 아름답지 않으니 약해지자. 누구든 늘 강할 수 없으며, 강해야 할 필요는 없으며, 약한 것이 때론 강한 것이라는 위로. 하염없이 약해질 것. 더 이상 구부러질 게 없을 때,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때, 그리고 이제 됐다 싶을 때 다시 단단해질 것. 돌아가서도 그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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